[시니어 에세이] 땐 땐 땐

'인생은 한바탕 춤과 같다.' 그리스의 작가 니코스 카잔스키의 장편소설 ‘희랍인 조르바’에서 조르바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럼 춤이란 무엇이냐니까 그는 일단 술 한 잔 마시라고 한다. 함께 술을 들이켠 다음, 자신이 나가서 춤을 출 테니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한바탕 신명 난 춤을 춘다. 춤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춤을 추어 보인 것이다. 소설과 같은 제목의 영화에선 안소니 퀸이 조르바로 신들린 듯 춤을 추는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화 포스터에도 이 장면이 담겼었다.
 
조르바의 춤이 떠오른 것은 순전히 내가 참여하고 있는 독서회의 한 남자 어르신 회원 때문이었다. 오전에 독서회 모임이 끝난 후 점심이라도 함께하며 담소를 즐기면 좋으련만 나는 이어지는 댄스 수업으로 갈 길이 바빴다.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그 어르신이 적극적으로 응원하며 면죄부(?)를 얻게 해주셨다.
 
“퇴직하고 20년 가까이 이것저것 다 배워봤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건 오직 춤밖에 없다."라며 그분은 “지금도 집에서 혼자 춤을 추어볼 때가 있는데 몸은 물론이고 마음에도 아주 유익하니 춤 수업만큼은 열심히 하는 게 좋다."라고 나를 격려했다. 연세가 있는 남자분이 춤에 대해 그렇게 말한다는 게 참 뜻밖이었다.
 
춤이라면 언뜻 댄스도 아닌 ‘땐스’, 아니 ‘땐 땐 땐’부터 떠오르는 내 편견 탓이었다. 지금이야 모든 신문이 가로쓰기 형태지만 90년대 이전만 해도 세로쓰기여서 신문 하단은 가느다란 담배 반 개비 길이와 폭의 일 단짜리 값싼 광고들로 빽빽한 게 보통이었다.
 
개인교습, 특히 댄스 교습 광고가 주를 이뤘는데 워낙 자리가 좁다 보니 댄스를 한 글자로 줄인 ‘땐’ 아래 전화번호를 넣는 게 다였다. 전화번호만 달리한 ‘땐’이 줄을 이으니 ‘땐 땐 땐…’으로 읽어졌다. 발음하기도 좋게 세 글자만 딴 ‘땐 땐 땐’을 나는 썩 건전하지 않은 춤바람을 일컬을 때마다 써먹곤 했었다.

알츠하이머병, 치매 예방 효과
 
그런데 지난봄 지역 생활체육회에서 라인댄스란 걸 시작하며 문득 ‘땐 땐 땐’이 튀어나왔다. 라인댄스에 대한 나의 무지 때문에 가족들에게 어떤 춤을 배우러 간다고 설명하지 못해서였다. 난생처음 해보는 거니 조르바처럼 추어 보일 수도 없었다. 아들 역시 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는지 “누구랑 눈 맞으시는 거 아녀요?” 농을 거는 바람에 다들 웃고 말았다.

사실 라인댄스는 미국에서 노년층을 위한 건강댄스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호회를 중심으로 한 중년층이 여러 장르의 춤과 음악을 섞어 배우고 추는 바람에 원래는 쉬운 이 춤의 장점이 덜해졌다지만, 지역 기관들에서는 미국처럼 활용되고 있는 편이다.
 
실제로 수업에는 60대 중반 이상의 실버여성들만 참여하고 있었다. 열댓 명의 수강생들은 음악에 맞춰 동시에 같은 스텝으로 춤추다가 함께 끝낸다. 한 음악에 같은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게 라인댄스의 특징이라 건만 첫 달엔 강사를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아서 음치 아닌 ‘몸치’임을 절감해야 했다.
 
나보다 대여섯 살 많은 다른 분들은 더한지 스텝의 방향을 잃어 얼굴이 마주칠 때도 잦았다. 그 순간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면 서로 웃으며 멋쩍음을 날려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다 날로 춤이 익어 음악을 타고 몸이 절로 움직여지니 심신이 얼마나 가뿐해지는지! 앉아서 머리로만 받아들이는 다른 강좌들과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 이래서 ‘젊어서는 국영수, 늙어서는 예체능’이란 말이 있는가 보다. 강사도 라인댄스가 스트레스 해소는 물론이고 리듬감이며 다이어트와 체력 향상에다 체형교정, 골다공증과 치매 예방효과까지 있다고 부추겼다. 그렇잖아도 최근 미국의 한 의대 연구진은 춤을 추면 알츠하이머병과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아 관심을 모았다.
 
읽기, 쓰기, 악기 연주 등 인지능력 자극 행동을 한 사람들과 유산소운동, 수영, 자전거 타기, 춤 등 육체활동을 한 사람들을 비교했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춤을 춘 사람들만 알츠하이머병과 치매 예방의 효과를 경험한 걸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기껏해야 6개월여 배웠는데도 춤이 몸과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걸 느낀다. 얼마나 무겁게 살아왔는지도 깨닫게 한다. 머리에 뭔가 그득하니 무거울수록, 늙어갈수록, 그래서 불안이나 두려움이 생길수록 춤이 필요할 듯하다. 특히 ‘희랍인 조르바’ 소설 속의 화자인 ‘나’처럼 세상의 근심 걱정은 혼자 다하고 본능마저 억누르려 애쓰는 소위 ‘먹물’에겐 더 그럴 것 같다.
 
반면 일자무식의 늙은 노동자 조르바는 아들이 죽었을 때도 춤을 추며 슬픔을 승화시키는 거침없고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는 ‘나’와 실현시키려던 마지막 꿈이 좌절됐을 때도 춤으로 아픔을 달랜다. 이윽고 ‘나’도 춤이 추고 싶어진다.

둘은 파도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춤을 춘다. 음악의 리듬은 점점 경쾌해지고 나중에는 두 주인공 자신의 리듬을 타고 흥겹게 자신들의 춤을 춘다. 그렇게 ‘나’의 인생관은 달라져가고, 작품은 삶의 진정한 가치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일전에 한 인문학 강의에서 들었던 조르바의 춤에 대한 해석에서 그 답을 엿보게 된다. 그의 춤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며, “관념 속의 인생을 말하는 게 아니라 춤추고 있는 자기 인생을 직접 보여준 것”이란 설명이었다. 인생을 긍정하고 삶을 찬미하는 그리스인 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얘기였다.
 
바로 그 정신으로 살아야 할 때가 노년이 아닐까. 생각만 하고 주저하며 살았다면, 관념 속에서 무겁게 살았다면 이제는 가벼워져야 할 때가 아닐까. 지금 가진 것에 연연하지 말고 하나, 둘, 결국은 다 내려놓아야 가벼워질 수 있으리라.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이다.
 
왠지 춤바람의 먼지가 일 듯 싶은 ‘땐 땐 땐’이 아닌 건강댄스를. 가장 소중한 현재 이 순간을 위해 일어나 행복한 도전을 해보는 것이다. 어느 시집에 실린 한 대목 그대로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인생은 한바탕 춤과 같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