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돈통 주며 "세어서 가져가라"… 동대문서 '거래의 기본' 배워

요즘 출장을 자주 다닌다. 지난해 중국 유력 부동산기업 진잉(金鷹·Golden Eagle)그룹과 합자를 한 뒤 중국 사업을 본격화하면서 관련 비즈니스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미스터피자 중국 매장에 현지 고객이 몰리자, 중국 대형 유통그룹이 입점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이런 분위기면 2017년쯤이면 지금 47개인 중국 점포가 1000개는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좋은 일이기는 한데, 몸이 고달플 때도 있고 순간순간 결단을 내려야 할 긴장된 상황에 몰리기도 한다.

이럴 때 문뜩 떠오르는 것은 내가 사업을 처음 시작한 동대문시장 시절이다. 1974년 군 제대 후 증권회사 취직이 결정돼 있던 나에게 아내는 취직 대신 동대문시장에서 장인어른과 함께 일해 볼 것을 제의했다. 장인어른은 섬유도매업체인 천일상사를 인수한 직후였다. 처음엔 거절했다가 결국 제의를 받아들였다. 일은 어려웠다. 우선 일을 하려고 하는 직원이 없었다.

하루는 10여명 직원은 모두 매장에 없고, 신입 사원 한 명만 손님을 맞고 있었다. 알고 보니 모두 다방에서 TV 권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손님이 있는데 가게를 비운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안 됐다.

한 이웃 점포 사장은 나에게 "직원들을 너무 믿지 말라"고 충고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언제라도 주머니에 판매금을 챙겨 넣을 수 있고 거래처와 짜고 속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당시 동대문시장에서는 직원에게 숙식만 제공하고 명절 떡값만 줄 뿐 월급은 주지 않는 상점도 많았다.

암담했다. 말로 타이르고 윽박지르기도 했지만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할 방법이 없었다. 불신(不信)의 뿌리가 깊었다.

나는 직원이 '주인 정신'을 갖지 못하면 내가 거상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매장에 붓으로 '퇴직금 지급 점포'라고 글을 써서 내건 일이었다. 직원에게 자부심을 주려는 시도였다. 또 옷과 여비를 줬다. 모든 직원이 개인 돈은 절대로 허비하지 않고 다 저축하도록 했다. 운전기사에게도 대기 시간에는 가게에서 일을 배우라고 했다. 우리 직원들은 당시 큰 회사 직원들이 양복 입고 오는 것을 많이 부러워했다. 그럴 때면 나는 "자네들이 더 부자가 될 테니 열심히 하자"고 했다.

이런 열성은 먹혔다. 직원들이 가게에서 떠나는 일은 없었고 손님에게 악착같이 물건을 팔았다. 6개월부터는 자연스럽게 매출이 오르기 시작했다. 이 직원 중에는 독립해 성공한 사람이 많다. 가게 일을 덤으로 배운 운전기사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많았다.

거래처와 믿음을 만드는 것도 직원에게 열성을 보인 것처럼 한 뒤에야 가능했다. 당시 거래처 사람들은 서울 모래내시장, 부산 국제시장, 대구 서문시장 등 전국 각지에 있었지만, 소문은 정말 빨리 퍼졌다. 동대문시장이 섬유 산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정보까지도 모인 것이다. 물건을 보냈는데 돈이 물건값보다 더 많이 왔다면 잘못 온 돈은 무조건 돌려줬다. 못 믿을 가게로 찍히면 그걸로 끝이었다.

동대문에서 거래의 원칙을 배운 것이 하나 있다. 돈을 받아야 할 사람이 말을 꺼내기 전에 줘야 할 쪽에서 먼저 연락을 하면, 돈도 신뢰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험도 해봤다. 현찰로 구매하는 작은 공장 사장들에게는 아예 돈통을 주고 "세어서 가져가시라"고 했다. 신기하게도 돈이 모자라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모두 세 번 이상 세고 또 세고서 가져갔다. 내가 준 믿음에 상대방도 자연스럽게 믿음으로 보답한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꼴도 당해 봤다. 아이들을 교육 때문에 미국에 보낸 뒤, 나도 한 달 정도 다녀왔다. 돌아와 보니 난리가 나 있었다. '정우현이 미국으로 재산을 빼돌리고 도망갔다'는 소문이 돈 것이다. 이 악성 루머로, 담보 없이 자유롭게 하던 신용거래가 거의 다 끊겨 버렸다. 마치 동맥이 끊기는 기분이었다. 10년 쌓은 신용이 한순간에 무너지다니…. 주요 거래처들은 담보를 받고서야 정상적인 거래를 시작했다. 신뢰를 만드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정말 뼈저리게 느꼈다.

1990년 외식시장의 성장세를 보고 나는 피자로 업종을 바꿨다. 미스터피자 1호점을 낸 이후 1996년에는 상표권을 원(原)소유자인 일본인으로부터 샀다. 지금 국내에 432개 점포를 두고 있다. 동대문시장에서 배운 사업의 본질(本質)은 피자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었다. '가족점 사장들'(가맹점주들)과 직원을 믿었고 그들도 나를 믿었다. 지금까지 장사가 안돼 문을 닫은 점포가 단 한 군데도 없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피자를 만들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도우(dough)라는 밀가루 반죽을 만드는 일이다. 이걸 잘못하면 피자 맛은 꽝이다. 1974년부터 1989년까지 동대문시장에서 보낸 15년은 정우현이라는 '기업인의 도우'를 만드는 과정이었다. 상품의 움직임과 거래의 법칙을 넘어 신뢰를 만들고, 쌓고 유지하는 방법을 배운 것이 오늘날 미스터피자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한다.


[정우현 회장은 누구인가?]

정우현(66) MPK그룹 회장은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진주고와 단국대 법정대를 졸업하고 ROTC를 마친 뒤 1974년 동대문시장에 있는 섬유도매업체 천일상사에서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1990년 이화여대 앞에 미스터피자 1호점을 냈다. 이후 미스터피자는 계속 성장해 현재 국내에 432개 매장이 운영되고 있다. 2000년부터 해외 시장에 진출해 현재 중국 베이징·상하이, 미국 등 50개 해외점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