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수고 던져진 세월… 8t 쇠공은 쇠멍을 품었다

자연의 세월을 이겨낸 바위가 아니다. 이 8t짜리 쇳덩어리는 쇠를 부수는 쇠다. 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와 단단히 굳은 쇠 찌꺼기(슬러지)를 부수기 위해 지남철 달린 크레인에 매달려 25m 높이에서 수직 낙하한다. 이름하여 파쇄(破碎)공. 깨뜨려 부수는 데 쓰이는 쇠공(球)이다. 지난 12년간 오로지 깨뜨리기 위해 지상을 향해 수없이 몸을 내던졌다. 16t이던 쇳덩이는 온몸에 상처를 안은 채 닳고 닳아 절반이 됐다. 비바람에 풍화된 바위보다 더 고통스레 그 세월을 인고(忍苦)하며 쇠멍들을 안으로 담아냈다.

조각가 정현(58)은 5년 전 포스코 포항제철소 야적장에서 파쇄공의 낙하 장면을 우연히 목격했다. 작업에 쓸 고철(古鐵)을 보러 간 길, 정작 가슴에 콱 박힌 건 이 쇳덩어리였다. 쇳덩어리가 떨어지는 순간 먼발치에서 내다보던 작가의 몸에 고스란히 진동이 전해졌다. 그때 작가는 "고흐의 거친 붓 터치보다도 더 숭고하며 응집된 시련의 흔적, 축적된 힘"을 봤다.

15일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 본관에서 개막하는 정현 개인전의 도입부는 이 파쇄공으로 장식됐다. 포항과 광양의 제철소에서 10t에 가까운 쇳덩이 3개를 가져왔다. '옮기는 행위'에만 작가가 개입하고 아무런 가감을 하지 않았다. 작가는 홍익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한 뒤 30년 가까이 폐기 철물, 침목, 석탄 같은 재료를 망치로 때리고 톱으로 자르는 수고를 담아 조각을 해왔다. '땀'이 흥건히 배 있는 그의 조각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번 파쇄공 조각은 낯설다.

"이 쇳덩어리에는 산업 현장의 온갖 시련이 고스란히 응축돼 있어요. 하찮은 재료에 들어 있는 인고의 과정을 보여주는 제 작업과 궤를 같이합니다. 다만 파쇄공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이 자체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생각한 거지요."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가 파쇄공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는 "마르셀 뒤샹이 시도했던 '오브제 트루베(objet trouv�·발견된 사물)'와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뒤샹은 변기에 '샘'이란 제목을 붙여 예술로 승화함으로써 하찮은 기성 물건에 미술 작품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부여했다. 얼핏 돌덩이와 철판을 사용하는 이우환의 조각 '관계항'을 닮았다고 하자 작가는 "이 선생은 둘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지만, 나는 그런 개입조차 하지 않았다. 물질 자체가 갖는 존재의 힘을 보여준 것"이라고 차이를 설명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파쇄공이지만 이번 전시를 받쳐 주는 주춧돌은 드로잉 70여점이다. "내게 드로잉은 조각하기 위한 모형이 아니라 최초 감정의 발현을 모아두는 저장소"라는 그는 감정이 휘발되기 전에 끊임없이 그림으로 남긴다. "어떤 이는 가슴으로, 어떤 이는 머리로 드로잉을 하지요. 저는 내장으로 합니다. 저 안 깊숙한 곳에서 소화하고, 도 닦듯이 그걸 꺼내지요."

파쇄공이라는 산업 현장의 엑스트라를 무대의 주연으로 세운 것처럼 드로잉에서도 석탄을 만들 때 생기는 부산물인 콜타르를 화폭의 주재료로 썼다. "하찮고 버려진 물건이라도 잘 들여다보면 그 재료가 품은 이야기, 시간이 보여요. 그걸 존중해서 작품으로 끌어올리는 거지요." 예술가의 소임은 단단한 통찰로 사물에 둘러싸인 굳은 편견을 깨부수고 참 가치를 찾아주는 것이란다. 어쩌면 그야말로 기성 예술의 파쇄공 아닐까 싶었다. 전시 다음달 9일까지. 문의 (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