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내곡동의 고구마밭은 특별합니다

6500여명이 사는 마을의 고구마 농사는 올해도 풍년이다. 약 1800㎏, 5㎏들이 박스 360개를 가득 채울 만큼이다. 고구마를 다 뽑고 나면 11월부터 김장용 배추와 무를 뽑을 것이다. 수확한 고구마와 무, 배추는 형편이 어려운 이웃 200가구와 노인정 9군데에 보내진다. 한때는 서울 강남구민이었고 이제는 서울 서초구민으로 살고 있는 내곡동 주민들이 12년째 이어오고 있는 '특별한 가을걷이' 이야기다.

북쪽으로 구룡산(306m), 남쪽으로 인능산(326m), 서쪽으로 경부고속도로로 둘러싸인 내곡동은 행정구역상 서울 최고 부촌 중 하나인 서초구지만 관내의 30% 이상이 농지인 독특한 곳이다. 한 개 동이지만 면적은 서울 중구보다 넓다. 1965년 서울로 편입되기 전까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안골이었다. 지금 살고 있는 주민들도 '안골' 시절부터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가 대부분이다. 마을에는 그러나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으면서 그냥 놀리는 땅이 많았다.

2003년 마을에 주민자치위원회가 생기고, 마을 대소사를 함께 의논하던 주민들이 "뭔가 마을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았다. 가장 먼저 떠올린 게 내곡동 내 유휴지였다. 최복순(60) 자치위원장은 "다른 지역보다 농지는 구하기 쉬울 테니 농사를 한번 지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외지에 사는 땅 주인은 "사용해도 좋다"며 흔쾌히 허락했다. 그는 "그린벨트로 묶여 개발하기도 애매하고 직접 농사를 짓기도 부족해 비워놓은 상태였다"고 했다. 주민들이 "거둬들인 농작물은 독거노인이나 저소득층 돕기에 사용할 것"이라고 하니 1600㎡(약 500평)를 내주면서 임대료도 받지 않았다.

수확기가 서로 다른 고구마·감자·무와 배추를 돌려가며 심기로 했다. 주민자치회 일을 하는 주민 40여명이 틈틈이 돌아가며 밭을 일궜다. 4월에 감자를 심어 6월 말에 수확하고 그 자리에 무와 배추를 심었다. 고구마는 5월 초에 심어서 10월 중순에 수확한다. 이웃들의 밥상에 당장 올릴 수 있는 작물이기도 했다. 주민 오금택(64)씨는 "고구마·감자는 비료나 퇴비를 안 해도 잘 크고 배추는 아주 어릴 때 두 번 정도만 비료를 주면 잘 자라기 때문에 품도 덜 든다"고 했다.

소식이 알려지면서 도움의 손길도 하나 둘 늘었다. 서초구는 트랙터를 빌려 와 농사를 짓기 전 밭을 갈고, 거름을 뿌려준다. 씨감자 비용도 지원하고 있다. 나머지 종자 비용이나, 비료 값 등은 주민자치위원회 회원 25명이 매월 3만원씩 내서 마련한다. 농작물을 기부한단 소식이 퍼지자 모종을 사러 가면 그냥 주는 가게도 생겼다. 주민센터는 일손이 부족할 때마다 일손을 모아주는 일을 맡고 있다.

어린이집 아이들은 체험학습의 기회도 얻고 나눔의 가치도 배운다. 내곡동 어린이집 관계자는 "도심에서 흙이 점차 사라져가는 시기에 아이들이 가까운 곳에서 직접 생태체험을 하는 게 얼마나 큰 기회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고구마를 뽑을 때는 여섯 살, 일곱 살 내곡동 어린이집 원생 30여명도 함께 참여했다.

내곡동의 고구마 농사는 몇 번 위기를 맞았다. 대단위 아파트들이 하나 둘 들어서면서 유휴지들이 아파트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3번이나 밭을 옮기면서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처음 농사를 시작했던 곳에서 약 1㎞ 떨어진 서울의 3305㎡(약 1000평) 규모 밭에서 고구마를 캔다.

4년 전엔 48일간 연속으로 비가 내려 매년 약 300상자씩 수확되던 감자가 모두 썩어버린 일도 있었다. 해마다 감자를 전해 받던 한 독거노인이 전화를 걸어 조심스레 물었다. "저… 올해는 감자 안 오나요?" 최한성(64) 전 주민자치위원장은 "우리 감자를 해마다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있단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말했다. 감자를 뽑아낸 자리에 얼른 고구마를 심었다. 천만다행으로 그해 고구마 농사는 대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