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안목 밤바다

‘주문받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머뭇거렸다. 메뉴판을 올려다보니 웬 커피 종류는 그리 많은가. 커피하면 블랙커피와 믹스커피 밖에 생각나지 않는 우리들에게 이런 곳에서 주문이란 난제 중의 난제다.

A가 불쑥 주문을 한다. ‘그냥 믹스커피 닮은 커피로 갖다 주세요.’ 모두 와르르 웃는다. 민망함을 감추려는 웃음이다. 주문 받으러 왔던 청년이 빙긋 웃으며 돌아선다. 뒷모습에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빛이 역력하다.

우리는 지금 안목바다에 와 있다. 바다에 왔으면 회를 먹거나 전복죽을 먹어야 하지만 우리는 지금 밤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어와 있다. 이 안목바다에서는 커피를 마셔야 제격이다. 하여 우리는 눈부시게 늘어선 어느 정갈하고 그윽한 풍경의 카페에 들어와 있다. 이곳 안목 바다에 왔으면 으레 카페에서 커피를 마셔야 제격이다. 창밖으로 밤바다가 보인다. 밤에 바라보는 바다 빛깔은 커피 빛깔과 닮아 있다. 커피는 낮보다 밤이 좋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안목 바다가 지금의 커피가 있는 카페거리로 변신하기까지는 전설처럼 회자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같이 강릉 출신에게는 안목바다라는 명칭 보다는 안목항이라는 명칭이 더 친숙하다. 말 그대로 안목항은 작은 포구였었다. 작은 어촌에 몇몇 어부가 살고 있었을 것이다.

저녁 무렵 바다 보다야 송정이 낫고 송정 보다야 안목이 더 나았으리라. 안목바다에 들렀던 어느 날 밤, 커피 자판기를 발견하고 이 게 웬 횡재나 싶어 동전 두어 개를 넣고 뽑아들었을 것이다. 밤바다 달빛 아래서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호호 불어가며 먹는 맛이란 얼마나 달콤하고 행복했겠는가. 이것이 입소문을 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급기야 커피 거리로 급부상을 했다는 것이다.

커피가 탁자 위에 놓였다. 한 모금 마셔본다. 시럽을 얼마나 탔는지 달콤함이 입안 가득 퍼진다. 속으로 ‘이건 아닌데　’ 하는 순간, 커피를 마시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던 A가 나직이 속삭인다. ‘왜 여기 와서 커피를 시켜 놓으면 첫사랑이 생각날까?’ 그리곤 허허거리고 웃는다. 돈 많은 남편 만나 시집 잘 갔다고 소문났던 그녀가 남편의 바람기에 두 손 두 발 들고 이혼을 했다.

그녀는 이곳이 고향이다. 안목항에서 태어났고 자랐으니 단연코 첫사랑도 이곳에 있을 것이다. 결혼하면서 안목바다에 던졌을 첫사랑을 그녀는 이곳에 와 앉아 건져 올리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의 첫사랑은 아직 진행형인지 궁금하다. 커피를 홀짝이며 우리는 간간이 마주보며 웃는다. 지나가 버린 사랑이나, 현재진행중인 사랑을 생각하면서….

갑자기 B가 나가자고 한다. 밤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고 싶단다. 답답한 모양이다. 마시다 만 커피를 남겨두고 우르르 몰려 파도 앞에 섰다. 다른 때보다 파도가 좀 세다 싶다. 그 세찬 파도소리에 자신의 소리가 묻힐까 봐 B가 소리 지른다. ‘난 말이야, 우리 딸들에게 터프한 남자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해.‘ 연애 시절 터프했던 매력에 빠져 지금의 남편을 선택한 그녀다. 그녀는 지금 회한의 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남편의 그 터프함 때문에 이혼의 위기를 수도 없이 넘긴 그녀다. 그녀 또 한 가슴 속엔 그녀를 따라다니던 한 남자를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A가 갑자기 밀려오는 파도 앞으로 뛰어든다. 놀란 우리가 달려가기도 전에 밀려오던 파도가 그녀의 발을 삼켜 버렸다. 그녀가 까르르 웃는다. ‘우린 아직 청춘이야. 청춘이라고!’ 밀려오는 바닷물에 잠긴 채로 그녀가 소리 지른다. B가 맞받아 소리 지른다. ‘야! 말은 바로 하자 우린 청춘이 아니고 노추(老秋)야. 노추!’ 또 까르르 넘어간다. 살면서 만들어진 상처가 너무 아픈가 보다. 곪은 상처를 바닷물에 덧나지 않도록 깨끗이 씻어내고 있는 모양이다.

난 모래사장 언덕에 자리하고 앉았다. 멀리 고기잡이배가 두어 척 보인다. 불빛이 유난히 밝은 걸 보면 오징어잡이배가 아닐까 싶다. 어느덧, 밤하늘에 그믐달 하나가 떠 있다. 아득한 어디선가 기타소리가 들린다. 나직한 노랫소리가 따라 들려온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 내 입에서도 나직나직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애와 내가 그 애의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누구나 다 타다만 숯동가리 하나씩 품고 산다. 너무나 깊은 곳에 있어 가물대며 살다가 바람 부는 날이면 문득 그 불씨가 살아난다. 그러나 안다. 세월은 그냥 가만히 놓아두라고 가르친 것을…. 그녀들이 내 앞에 와 섰다. 발에 신발에 묻었던 모래알들을 이미 다 털어 버렸다. 씩씩하게 길로 올라선다. 그믐달이 빙긋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