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두세요… 맛있어지는 중입니다

서울 신사동에 있는 프랑스식 주점 '루이쌍끄'엔 햄·소시지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오너셰프(주인 겸 주방장) 이유석씨가 직접 만들어 숙성시키는 중이다. 이씨는 이 햄과 소시지를 요리에 사용하거나 치즈와 함께 와인용 모음 안주로 담아 낸다. 청담동에서 '레스쁘아'를 운영하는 임기학씨는 지난 6일 도산공원 앞에 와인바 '꺄브뒤꼬숑(Cave du Cochon)'을 열었다. 지리산에서 사육한 흑돼지로 만든 햄·소시지·파테 등 프랑스식 숙성 육가공품을 주 메뉴로 내세웠다. 임씨는 "2~3년 전부터 샤르쿠트리(charcuterie·프랑스식 숙성 육가공품)에 관심을 가졌다"며 "레스쁘아에는 설비 놓을 자리가 부족해 아예 새 식당을 차리게 됐다"고 말했다.

◇가장 오래된 요리법에 꽂힌 21세기 요리사들

요즘 요리사들 사이에선 '숙성'이 최대 관심사다. 숙성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전통적인 요리법이다. 서양에선 주로 육류나 동물의 젖을 숙성·발효시켜 햄·소시지·치즈를, 동양에선 콩을 이용한 된장·간장·고추장 등 장류(醬類)나 장아찌 따위 저장식품을 만들어 먹어왔다.

이 오래된 숙성 요리법이 재조명된 건 2000년대 후반부터다. 액상질소, 진공조리기, 칼륨 등 과학실험실에서나 사용할 법한 재료와 도구를 이용해 낯설고 새로운 맛을 창조해내던 '분자요리'에 세계 미식계가 질려가던 때다. 일련의 젊은 요리사들이 과거와 자연에서 영감을 찾았다. 이들이 주목한 전통 요리법이 인위적이지 않으면서 식재료의 맛을 변화시키는 숙성과 발효다. 덴마크의 세계적 요리사 르네 레드제피(Redzepi)는 주방에 아예 '발효숙성실'을 만들었다. 그의 레스토랑 노마(Noma)가 '세계 50 베스트 레스토랑'에서 1위를 차지하자 요리사들이 앞다퉈 숙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 음식이 세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서양에는 육류나 유제품을 숙성시킨 음식은 많지만 콩이나 채소를 활용한 숙성음식은 몇 되지 않는다. 파스칼 바르보(프랑스), 토머스 켈러(미국), 비요른 프란첸(스웨덴) 등 세계 정상급 요리사들이 한국을 찾았고, 사찰이나 종가를 방문해 장과 장아찌 담그는 법을 배워갔다.

◇삼겹살도 숙성시켜 먹으면 더 맛있다

숙성에 대한 정상급 요리사들의 관심이 이제 일반으로 전파·확산되는 추세이다. 육가공업체 에쓰푸드에서 운영하는 델리형 매장 '존쿡 델리미트'에서는 생(生) 소시지 만들기 수업을 일반인 대상으로 연다. "매번 수강 신청이 조기 마감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한다.

일반 가정에서 숙성 기법을 활용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도 출간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맛있어진다'(디자인하우스)는 일본 도쿄에 있는 숙성요리 음식점 '시모키타자와 숙성실' 주인인 후케 마사키가 썼다. 그는 "숙성의 최대 장점은 놓아두기만 해도 맛있어진다는 것"이라며 "소금이나 오일로 절여두면 보존성도 뛰어나다"고 했다.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돼지 삼겹살과 목살은 고기 중량의 3%에 해당하는 양의 소금(돼지고기 500g 기준 소금 15g)을 고루 뿌리고 손으로 주무른 뒤 랩으로 단단히 밀봉해 냉장고에 하루~사흘 정도 숙성시킨 뒤 굽거나 수육으로 요리해 먹으면 감칠맛이 훨씬 좋다고 후케씨는 말한다.

소고기는 고기 중량의 1.2~1.5%(사태·우둔살 500g 기준 소금 6~8g)가 적당하다. 버섯(450g)을 올리브오일(30g)에 볶아 화이트와인(2큰술)을 붓고 2분쯤 찐 다음 마스카르포네 치즈, 안초비, 레몬즙, 소금·후추 등을 넣고 믹서에 곱게 갈아 하루~사흘 정도 냉장고에 숙성시킨 '버섯 페이스트'는 그냥 먹어도 좋고 빵이나 밥에 곁들이기에도 훌륭한 반찬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