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내 손자는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

여섯 살 먹은 손자 녀석이 앞장을 서서 아파트 옥상으로 오른다. 뙤약볕이 내리쪼이는 옥상 한쪽의 상자 텃밭에 토마토와 고추가 빨갛게 익어간다. 나보다 한발 앞서 오른 손자가 쏜살같이 토마토를 심어놓은 상자 텃밭으로 달려간다.
 
“할머니, 빨리 와 보세요. 토마토가 빨갛게 익었어요. 딸까요?”

“그래 따려 무나. 대신 빨갛게 익은 거만 따야 해”

“할머니, 고추가 또 익었어요. 빨개요.”

“그래, 그럼 그것도 따렴”

“와~~할머니! 메뚜기가 있어요.”

한참을 종알대며 빨갛게 익은 것들을 따더니 어디서 나왔는지 메뚜기 한 마리를 보곤 환성을 지른다. 아마도 배추 모종을 살 때 같이 온 모양이다. 처음엔 어려서 죽은 줄 알았는데 용케 살아 있었다. 이젠 제법 메뚜기 티가 난다. 날개가 누렇다. 가을은 가을인 모양이다.
 
아파트 옥상 시멘트 바닥으로 뛰쳐나온 메뚜기가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 메뚜기를 손자도 덩달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러다 메뚜기가 딸기 잎 새로 숨어 버리자 제 몫의 작은 물뿌리개를 가져온다. 큰 고무통에 받아 놓은 빗물을 담기 위해 그 큰 뚜껑을 낑낑대며 들어 바닥에 내려놓는다. 앙증맞은 손으로 물뿌리개를 잡고 물을 가득 담더니 토마토에 물을 준다. 뜨거운 가을 햇살에 이마엔 땀이 줄줄 흐르는데 덥지도 않은지 신이 나서 물을 준다.

김장배추를 심어놓고 벌레 먹을까 봐 한사망을 씌워놓고 길렀는데 물을 주다 말고 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한사망을 씌운 것이 영 궁금한 모양이다. 왜 한사망을 씌워 놓았는지 묻는다.

배추벌레가 살면 배추를 다 먹어 치운다는 설명에 그 배추벌레는 나비가 된다고 제법 의젓하게 쫑알거린다. 이건 김치 담글 거라고 배추를 나비애벌레가 다 먹으면 김치를 못 담는다고 하자 뭘 아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 나란히 앉아 배추를 심은 상자 텃밭을 들여다본다. 나는 얼마나 컸나 들여다보고 손자는 나비애벌레를 찾는 모양이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다. 주인이 들여다보는 걸 배추들이 눈치라도 챈 걸까? 한사망이 비좁다 배추들이 아우성이다. 배춧잎이 등허리가 꺾이고 목이 꺾이더니 이젠 한사망을 뚫고 나올 기세다. 주인 잘 못 만난 탓에 작은 상자텃밭에 다섯 포기 여섯 포기를 심었으니 내 어머니 말대로 궁둥이 돌릴 틈도 없다.

서울살이가 원래 그런 거라고, 너희도 드넓은 시골의 배추밭으로 팔려 가지 못하고 나를 만났으니 원망 말라고 못 본 체했다. 손자 녀석이 눈치챘는지 배추가 너무 많다고 한다. 아무래도 다른 상자텃밭에 두세 포기는 옮겨 심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손자는 배추들에도 물을 주고 또 주고 신이 났다.

내 손자는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다. 독일어로 아스팔트 킨트(Asphalt Kint)라는 말은 우리말로 하면 아스팔트의 아이라고 번역이 된다. 도시에서 태어나 흙을 밟아보지 못하고 자라는 세대를 일컫는 말이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 보면 나중에 커도 고향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는 아이라는 뜻이다. 너무나 불행한 세대다.

손자에게 꿈을 주고 싶었다. 고향을 주고 싶었다. 고향이 없는 삶! 얼마나 삭막한가. 봄이 오고 있는 어느 날, 구청에서 상자텃밭을 준다기에 달려갔다. 이미 다 예약이 끝났다는 직원 말에 그래도 혹시나 해서 예비 신청자 명단에 올려놓고 돌아왔었다. 운이 좋았다. 내 차례까지 상자텃밭이 돌아왔다. 그 상자텃밭에 한사망을 씌우고 얼갈이배추를 심고, 열무를 심어 김치를 담았다.

상자텃밭에 심었던 상추는 얼마나 잘 자랐는지 감당이 안 됐었다. 내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상추들을 따서 나누어 주었다. 아파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동창 모임에 들고 나가 한 봉지씩 나누어 주고, 직장 동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모두들 얼마나 좋아하던지.... 파는 상추보다 두텁고 고소해서 모두가 다 환영이었다. 길러서 주는 맛도 꽤 괜찮았다.

손자 녀석이 집에 가겠다고 일어서더니 자기가 딴 토마토를 담은 비닐봉지를 챙긴다. 집에 가져가 먹겠다고 한다. 엄마 보고 토마토 주스를 해 달라 하겠단다. 올 때마다 고추니 상추니 들고 가는 맛이 단단히 들었다. 적어도 내 손자는 상추나 토마토가 마트에서 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먼 훗날 토마토나 상추 앞에서 이 할머니를 떠올리며 그때 그 맛은 참으로 고소했다고 말할 것이다. 토마토 보따리를 들고 개선장군처럼 아파트를 나서는 손자 등 뒤로 유난히 가을 햇살이 눈부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