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0.30 04:00 | 수정 : 2014.11.04 13:27

최남선이 조선 10景으로 꼽았고 김삿갓이 세번 드나든 절경…
16개 마을이 수몰된 동복호엔 가을 노을이 붉디 붉다

갇혀있던 빛이 터져나올 때, 비로소 색(色)이다. 울음을 닮았다. 오래 가둬둔 빛일수록 더 크고 맹렬히 전신을 흔든다. 지난 25일, 화순적벽이 30년 만에 처음 일반에 몸을 열었다. 전남 화순군의 동복댐 건설로 1984년부터 상수도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출입이 통제됐다가, 관광자원화를 위해 광주시와 화순군이 용단을 내렸다. 올해는 사전 예약자만을 대상으로 11월까지만 시범적으로 문을 연다. 가을이 저무는 동시에 적벽(赤壁)은 색을 감출 것이다. 아무렴, 너무 오래 울면 눈만 빨개질 뿐.

25일 동복호에 배를 띄운 뒤 화순적벽을 올려다봤다. 시원하게 뻗은 절벽의 아찔함,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의 연한 홍조가 겹친다. 바람이 시원해 눈이 맵지 않다.
25일 동복호에 배를 띄운 뒤 화순적벽을 올려다봤다. 시원하게 뻗은 절벽의 아찔함,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의 연한 홍조가 겹친다. 바람이 시원해 눈이 맵지 않다.
적벽의 가을을 마주하다

시퍼런 수심 앞에서, 573m 옹성산 서쪽 면이 갑자기 끝난다. 누가 옆으로 할퀸 것처럼 수평의 절리(節理)가 가파르다. 동복댐 상류에서부터 7㎞ 구간에 형성된, 이 오랜 풍화와 침식의 이름이 적벽이다. 배를 띄운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 10경 중 하나로 꼽았고, 김삿갓이 세 번이나 드나들다 생이 저물어버린 절벽의 주름진 민얼굴 가까이로 간다. 광주시 상수도 사업본부의 8인승 모터보트를 집어 탔다. 놀란 물오리 떼가 담수 위를 날아오른다.

5분쯤 가면 멀리 대나무숲 너머로 송석정(松石亭)의 팔작지붕이 보인다. 조선조 광해군 때 양인용이 당쟁을 피해 종4품 벼슬을 버리고 귀향해 소요한 곳이라 한다. 5분쯤 더 가면 정면에 항아리 모양 옹성산이 보인다. 그리고 곧 적벽이다. 화순적벽은 창랑천이 옹성산을 휘둘러 깎아 만든 4개의 절벽, 즉 노루목·보산·창랑·물염적벽을 통칭하는데, 창랑·물염적벽은 도로변에 있어 신비감이 덜하고, 이 중 가장 웅장한 노루목적벽을 보통 화순적벽이라 한다. 원래는 그냥 석벽(石壁)이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화순으로 유배 온 신재 최산두가 중국 북송대의 시인 소동파가 쓴 '적벽부'에서 이름을 따 붙였다. 적(赤)이라 했지만, 사실 황(黃)에 가깝다. 거친 화강암의 균열마다 그림자가 스며든다. 거대한 토담 같다.

전남 화순 절경
저녁 무렵의 화순적벽 전경.

배를 더 가까이 댄다. 올려다본다. 고개를 한없이 꺾어야 한다.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수목이 벽화처럼 붙어있다. 혈기는 빠져나가고 이젠 해와 바람의 물결을 갖게 된 돌이 눈부시다. 기어오른 붉은 담쟁이가 한 폭 산수화에 인장을 찍는다. 적벽의 높이는 80m쯤 되는데, 적벽 중앙에 '적벽동천(赤壁洞天)'이란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신선이 사는 곳'이란 뜻으로 화순 현감 이인승이 새긴 것이다. 신선계 바로 밑에 인간의 마을이 잠겨있다. 20~30m 수심의 끝에 16개 마을이 가라앉았다. 587가구, 2654명이 집을 비웠다. 댐이 생기기 전, 적벽 밑엔 창랑천이 흘렀다. 천이 얕으니, 올려다보는 적벽은 까마득했을 것이다. 해가 기운다. 적벽이 붉어진다.

배에서 내려 차로 10분쯤 달리면 화순적벽 초소, 여기서부터 4.8㎞ 일방통행 비포장도로를 달리면 망향정이다. 물 밑의 마을을 위해 화순적벽 맞은편, 보산리에 실향민들이 1998년 정자를 세웠다. 망향정 앞 커다란 비석에 새겨진 4언절구 '적벽팔경'이 한산사의 저녁 종소리, 적벽 위의 불꽃놀이, 학탄에 돌아오는 돛단배 따위를 불러낸다. 이날 댐 수위는 만수(滿水)였다. 노을이 지니 노루목이며 보산적벽의 낯이 불콰해진다.

보산은 고대 삼한시대의 소도(蘇塗)였다. 신성한 땅이라, 죄인이라 해도 이곳에 오면 잡을 수 없었다. 3㎞쯤 가다 도로 중간에 차를 세운다. '포토 존'으로 어울릴 만큼 지형이 가장 높은 곳이다. 다시 적벽과 망향정을 바라본다. 해가 넘어간다. 잡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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