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11.06 04:00

가을의 끝, 경기도 연천

물 마른 재인폭포에는 기암괴석이 가을 햇살을 맞는다. 계절의 흔적이 연못에 부유한다. 폭포를 떠나면 이제 여행은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Canon 5D MarkII, EF 24-70㎜ 2.8L USM, 셔터스피드 1/40초 조리개 f10 감도 ISO100.
물 마른 재인폭포에는 기암괴석이 가을 햇살을 맞는다. 계절의 흔적이 연못에 부유한다. 폭포를 떠나면 이제 여행은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Canon 5D MarkII, EF 24-70㎜ 2.8L USM, 셔터스피드 1/40초 조리개 f10 감도 ISO100.

가을의 꼬리를 밟으러 간다. 즐길 만한 경치가 있고, 새겨들을 만한 역사가 있다. 경기도 연천 이야기다.

연천에는 줄을 타는 재인(才人)이 살았다. 사내는 아름다운 여자와 사랑을 했다. 주색을 밝히는 탐관오리가 명했다. 폭포 위에서 줄을 타거라. 엄명에 사내가 줄을 타는 동안 누군가가 줄을 끊어버렸고 사내는 폭포수 아래로 떨어져 죽었다. 여자는 수청을 자원해 옷고름 풀려는 원님 코를 물어뜯어 버리고 폭포 위에서 자살했다. 코를 물었기에 폭포가 있는 마을은 코문리라 불렀다. 지금은 고문리로 변했다.

전형적인 관탈민녀(官奪民女)형, 그러니까 이 땅 기암절벽에는 하나씩 있는 나쁜 관료와 비련의 여자 이야기다. 재인폭포는 전설이 있을 법한 절경이다. 마그마가 식으면서 생긴 뾰족뾰족한 주상절리(柱狀節理) 절벽은 사망하기 전에 이미 재인을 혼절하게 만들었으리라. 외줄에 의지해 그 위를 걸었으니, 아내 잃게 된 사내는 오죽 정신이 없었을까. 폭포수 줄어든 가을 절벽은 더욱 기이하다.

재인폭포가 있는 한탄강은 화산이 만든 협곡이다. 가끔 협곡 강줄기가 푹 꺼지며 폭포가 됐다. 그래서 재인폭포는 보이지 않는다. 내려가야 볼 수 있다. 연천군에서 설치한 유리 바닥 전망대가 아찔하고, 폭포 아래로 내려가는 철계단이 아찔하다. 연천에 있는 시대 미상의 기경, 재인폭포다.

서기 1392년 7월 이성계는 공양왕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고려의 마지막 왕으로 등극했다. 나라를 새로 세우겠다고 결심한 이성계는 왕권을 계승한 지 넉 달 만에 개경에 있는 고려 종묘를 싹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조선 종묘를 세운다.

2년 뒤 개국공신 박위의 졸개들이 경상도 밀양에 있는 점쟁이 이흥무를 찾아갔다. “주상 전하와 공양왕 중에 누가 더 운이 있는가.” 점쟁이는 “다음 왕은 다시 왕씨”라 대답했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학살극이 벌어졌다. 점쟁이한테 갔던 졸개들은 목이 잘려 죽었다. 강화, 삼척, 거제에 숨어 있던 옛 왕씨들은 바닷가에 전원 집합돼 수장됐다. 이런 스토리를 알고 숭의전으로 간다. 개경에서 사라진 고려 종묘가 다시 세워진 곳이 연천이다.

태조 왕건은 후고구려 궁예의 심복이었다. 개경 집과 철원 근무지는 거리가 180리였다. 그 딱 중간에 연천이 있다. 왕건은 연천에 있는 한 절을 즐겨 찾아 기도를 하고 심신을 쉬곤 했다. 이성계는 이 절 근처에 고려 종묘를 세워줬다.

이성계가 죽자마자 숭의전은 피폐화된다. 근 60년이 흐른 1451년에 이르러서야 무너진 사당을 보수하고 정몽주를 비롯한 고려 충신 위패도 추가한 뒤 숭의전이라 이름하고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초대 집사 왕순례는 지금 숭의전 너머 고갯길 옆에 묻혀 있다. 한 나라의 종묘라 하기에는 초라하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역사가 작은 집에 숨어 있다. 강변 산책로도 근사하다.

재인폭포에서 숭의전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가야 한다. 숭의전에서 더 서쪽으로 가면 이제 고구려와 신라를 만나게 된다. 호로고루(瓠蘆古壘)가 나온다. 호로강에 있는 높은 성루라는 뜻이다. 연천에 흐르는 임진강은 삼국시대에는 호로하(瓠蘆河)라 불렸다. 호로고루는 이곳을 점령했던 고구려의 성이다.

경순왕릉 근처에 있는 고구려 성, 호로고루.
경순왕릉 근처에 있는 고구려 성, 호로고루.
강변에 있는 삼각형 형태의 높은 땅에 성을 쌓았다. 두 변은 절벽이라 성벽을 쌓지 않았고, 탁 트인 밑변 쪽에만 현무암으로 성벽을 만들었다. 강을 건너는 백제·신라군을 감시하기에는 딱 좋은 위치고 불화살이며 돌멩이를 던지기에도 적지다. 세월은 가고 나라도 사라졌다. 성터에는 쑥부쟁이가 가득 피었다.

호로고루에서 10분을 더 서진하면 경순왕릉이 나온다.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준 신라 마지막 왕이다. 978년 개경에서 죽은 경순왕의 운구 행렬이 경주로 향했다. 반란을 우려한 고려 정부는 “왕릉은 개경 10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며 행렬을 세웠다. 그곳이 여기 임진강 고랑포 포구다. 왕릉은 완전히 잊혔다가 769년이 지난 1747년 다시 발견됐다.

비석에는 총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묘를 지키는 양석(羊石)은 엉덩이가 깨져 있다. 비석 앞에는 혼령이 나와서 놀기 좋으라고 혼유석(魂遊石)이 마련돼 있다. 한적한 밤이면 경순왕이 그 돌 위에 앉아 무슨 생각을 할까. 나라를 잃었다며 금강산으로 가버린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를 위해 최근 경주김씨 태자파 후손들이 경순왕릉 근처에 영단(靈壇)을 만들어놓았다. 호로고루 맞은편 언덕이다.

이렇게 삼국시대부터 조선조까지 그 숨 막히는 역사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땅도 드물다. 더군다나 연천에는 선사 유적지까지 있지 않는가. 폭포 아래 연못에는 계절이 남긴 흔적이 조용히 부유(浮游)할 것이고.

[그래픽] 경기도 연천 명소·맛집
* 주변 정보(괄호 안은 내비게이션 검색어·5개 만점 별표 평가)

1. 먹을 곳

①망향비빔국수(연천 망향비빔국수/청산면 궁평리 231-2·★★★★):
지독하게 매운 중독성 비빔국수 원조집. 5000원. 양 적고 덜 매운 아기국수 1000원. 만두 3000원. (031)835-3575

②보정가든(한탄강관광지·★★★★): 두부 요리 전문. 두부구이 보리밥 6000원. (031)832-0063

2. 한탄강관광지(한탄강관광지·★★★): 정비 잘 된 산책로. 입구에는 전곡리 선사 유적지도 있다.

[백미는 기암괴석… 조리개값 최소로]

1. 재인폭포는 기암괴석이 포인트다. 따라서 ‘디테일’을 묘사하려면 조리개를 최소한으로 조일 것. 렌즈는 표준 줌 렌즈(24-70㎜)를 준비한다. 가급적 삼각대를 가져갈 것.

2. 절벽 주상절리 디테일들도 좋은 피사체다. 대낮보다 아침이나 늦은 오후에 가면 그림자가 풍부한 입체적인 사진을 찍을 수 있다.

3. 폭포수가 많이 줄어 있으니 폭포보다는 절벽에 초점을 맞출 것.

조선일보 조선닷컴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