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혼자서도 잘 놀아요

“꺼야 꺼야 할 거야 혼자서도 잘 할 거야 예쁜 짓 고운 짓 혼자서도 잘 할 거야….” TV 프로그램을 통해 자주 들어서 절로 입에서 나오게 되는 동요 ‘혼자서도 잘해요’다. 뭔가 혼자 잘 해내려고 애쓰는 아이에게 추임새와 박수를 마음껏 보내며 만면에 미소를 머금게 될 듯한 노래다.

하지만 어느덧 청춘에 이르러서의 혼자는 영 딴판으로 바뀐다. 걸 그룹이 부르는 ‘나 혼자’만 해도 그렇다.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를 보고, 나 혼자 노래하고….”  노래 분위기가 썰렁하다 못해 그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판이다. 하기야 연인이 떠나고 난 후 홀로된 외로움과 괴로움을 토로하자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별 때문이 아닐지라도 혼자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노래한다면 쓸쓸해지기에 십상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물건은 모두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소유물은 바로 ‘나만의 시간’이었다. 단 10분이라도 내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바랄 게 없다”던 재클린 오나시스와 같은 명사가 아닌 바에야.  

요즘은 네 집 중 한 집이 1인 가구라고 할 만큼 ‘나 홀로’ 삶이 늘고 있다. 굳이 1인 가구가 아니더라도 한 지붕 아래 가족 수가 줄어든 데다 제각각 바쁘다 보니 얼굴 마주하기조차 쉽지 않다. 당연히 혼자 밥을 먹고 노래하는 것쯤은 누구에게나 다반사일 게다.

집에서만이 아니다. 혼자 부담 없이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음식점이 생겼는가 하면, 혼자 노래방의 마이크를 잡고 소리 높여 노래 부르며 스트레스를 날리기도 한다. 허나 다 젊을 때의 얘기지, 나이 들어 밖에서 혼자 먹고 노래하면 괜스레 초라해 보이는 건 아닐까.

나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건 또 어떤가. 내 경우 한 번도 혼자 가본 적이 없는 탓에 관심 또한 못미쳐선지 자주 가는 편인데도 나 홀로 관람객을 별로 본 기억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며칠 전 드디어 내게도 혼자 영화관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닥쳤다. 영화 표 한 장 때문이었다. 대학생 아들이 모처럼 헌혈이란 좋은 일을 하고 받아온 것이었다. 무얼 바라고 헌혈을 한 건 아니었는데 기념품까지 준다기에 그중 엄마가 좋아할 영화 표를 골랐노라고 했다.

헌혈도, 영화 표도 기특해서 잘 쓰겠다며 보관해둔다는 게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가을이 가기 전에 친구와 영화나 한 편 봐야지 하고 표를 찾아보니, 아뿔싸! 수개월의 기간을 다 보내버리고 사용기한이 단 이틀 남아있는 게 아닌가.

영화 표 한 장 더 사는 김에 멋진 음식까지 대접하겠다면 동행할 친구 하나 그새 못 구하랴 싶었다. 안팎으로 여럿을 꼬드겼으나 어찌 다들 그리 바쁜지…. “좀 일찍 말하지 그랬냐”는 원망만 되레 들었다. 그냥 영화 표였다면 포기했을 테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그럴 순 없었다.

그래, 한번 혼자 가보는 거야. 돈을 더 주더라도 이왕이면 실황의 감동을 스크린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클래식 플레이 상영작을 보기로 했다. 동행이 있다면 취향을 고려해야 하니 결정이 쉽지 않았겠지만, 혼자인 참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마침 뉴욕 브로드웨이에 가야 볼 수 있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를 상영 중인 영화관이 있었다. 토요일 오후 3시께라 영화관 로비는 북적거렸지만 정작 내가 들어간 클래식 상영관 안은 한산했다. 슬쩍 둘러보니 30명이나 앉았을까 한데 뜻밖에도 나 홀로가 여럿이지 않은가. 그렇구나, 혼자서도 이렇게 오는구나. 순간 공연히 졸아들었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그 누구도 신경 쓸 것 없이 뮤지컬에 몰두할 수 있었다.

걸 그룹의 노래에서는 슬프기 짝이 없었던 “나 혼자 영화를 보고”가 나만의 온전히 즐거운 시간이 됐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괜히 자신감이 붙는 것이었다. 초라할 것 하나 없네. 그래, 이제 혼자 음식점도 노래방도 도전해 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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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할 때 슬픔은 나눠지고 기쁨은 배가 된다고 한다. 늙어가며 외로움이 깊어갈수록 더해질 것이다. 그래서 나이 들면 나와 다른 사람, 만나면 허접스럽게 시간을 보내게 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관계를 이어가라고들 말한다. 그러느니 차라리 책을 읽거나 자기 시간을 갖고 말지하며 고개를 흔드는 이들도 있다. 어느 쪽으로든 치우치지 않는 중용적 처신이 필요하리라. 하지만 가능하다면 가족이며 친지와 함께하는 게 좋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혼자인 경우들도 있다. 아니, 결국 모든 사람의 노후는 혼자랄 수 있다. 이미 노인 5명 중 1명이 홀몸노인이라지만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자녀가 있든 없든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누구나 혼자 아닌가. 점점 더 ‘혼자서도 잘해요’가 중요해지게 된다. 그 가운데서 ‘혼자서도 잘 놀아요’는 더욱 중요해진다. 적어도 밥걱정은 없이 살 때, 나이를 견디는 힘은 잘 노는 데서, 주위 사람만 바라지 않고 혼자서도 잘 만들어내는 즐거움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일흔 넘은 선배 한 분은 가끔 '혼자 놀고 있어요'하면서 즐기고 있는 ‘증거’를 내게 보내온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뜰의 갖가지 풀꽃들을 바둑판처럼 구성해 하나로 만든 사진이다. 혼자 놀기 위해 사진 구성법을 배웠다고 했다. 선배는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먼 교수가 추천하는 ‘음미하기’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바로 가벼운 일상에서도 즐거움을 발견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찰나를 포착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것이다. 즐거움은 마음가짐에 달려있다는 얘기다.

어느 호스피스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말하는 세 마디가 있다고 한다. '그때 좀 참을 걸, 그때 좀 베풀걸, 그때 좀 즐겁게 살걸'이다. 참거나 베푸는 건 때가 돼야 할 수 있다 해도 즐겁게 사는 건 지금 이 순간부터 마음먹기 나름 아닐까. 함께 어우러질 때는 어우러지는 대로, 나 홀로라면 홀로 대로 즐겁게 사는 것, 혼자서도 잘 놀아야 가능할 터다. 꼭 어디를 가고 특별한 무엇을 해야 맛은 아니다. 음미하기만으로도 족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