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낙엽을 밟으며…

아침 일찍 일어나 둘레길을 걷는다, 새벽 공기가 차갑다. 방 안 공기만 생각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섰더니 겨울은 아주 가까이 와 있다. 아침 뉴스에서 영상 2도니 3도니 하던 이야기를 흘려들은 게 후회스러울 만큼 새벽 공기가 서늘하다. 소매를 길게 내려 양손을 소매 끝으로 추위를 피해보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시려 온다.
 
발 아래 떨어진 은행잎이 소리 없이 밟힌다. 푹신푹신하게 느껴지는 발 아래 감촉도 좋다. 밟고 자나가려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일찌감치 떨어진 낙엽들은 벌써 돌 틈이나 계곡에 자리 잡고 겨울 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가로등을 휘감고 올라갔던 빨간 담쟁이도 힘이 다 빠졌는지 작은 바람에도 바르르 떨고 있다. 밤사이에 내린 상수리나무 나뭇잎 하나가 지난 밤 비에 젖어 둘레길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 있다. 그야말로 젖은 낙엽이다.

젖은 낙엽이란 생각에 씁쓸한 웃음이 입가에 맴돈다. 도쿄 대학 어느 교수가 이름을 붙였다는 젖은 낙엽족(族)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일본에서는 젖은 낙엽을 ‘누레오치바’라고 부른다. 모두가 알다시피 젖은 낙엽은 길바닥에 눌러붙어 빗자루로 쓸어도 바람이 불어도 잘 떨어지지 않는다. 치워버리고 싶지만 쉽게 치워지지 않아 골치가 아프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젖은 낙엽족이다.

'젖은 낙엽족'이란 은퇴한 사람을 말힌다.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는 노년의 남자. 쓰고 싶지만 돈은 없고, 그러나 할 일은 없고…. 아내가 나가려고 할 때마다 같이 붙어 나가겠다고, 아내와 떨어지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착 달라 붙는다. 제대로 노후 준비도 못 한 남자가 아내의 그늘로 파고들어 아내를 졸졸 따라다니니 아내로서도 미칠 일이다. 아무리 떨어내려 해도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는 노년의 남자. 그들이 아내 입장에서는 부담스럽기만 하다. 젊어서는 아내 보기를 돌 같이 하고 살다가 나이 들어 착 달라붙으니 영 불편하다. 혼자 생활에 익숙해진 아내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비를 맞아 젖은 낙엽에서는 애잔한 슬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가을 나뭇가지에서 떨어지지만 않았다면 곱게 타오르는 아름다운 단풍이었을 것이다. 길바닥에 떨어져 뒹굴어도 젖지 않았다면 땔감으로라도 쓸 수 있었겠지. 어쩌면 이효석 님의 ‘낙엽을 태우면서’라는 수필에 나오는 것처럼 낙엽을 긁어모아 태우면 갓 볶아낸 커피 냄새가 날 테니 커피 좋아하는 아내들이 떨어지는 낙엽을 앞 다투어 긁어모을 지도 모른다.
   
인터넷을 떠돌다 보면 젖은 낙엽에 대한 여러 우스갯소리가 보인다. 그 중에서도 동창회를 다녀온 아내 이야기가 많이 회자된다. 어느 날 동창회에 다녀온 아내가 화를 낸다. 남편이 당연히 돈이나 차림새가 다른 동창에 뒤처져서 그럴 거라고 짐작하며 조심스럽게 묻는다. "왜 그러냐?"고 그러자 아내가 소릴 버럭 지르며 "나만 남편이 살아 있잖아!" 하더란다. 웃어넘기기에는 너무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다. 경제력을 잃었다고 살아 있지 말라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우스갯소리로 할 수 있는 이 사회가 너무 끔찍하고 슬퍼진다.

누군가 어깨를 툭 친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커다란 상수리나무 낙엽 하나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니 문득 생각나는 시가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하는 구르몽의 시구가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읊는 시이다. 좋으냐고, 좋으냐고 몇 번이고 묻지만 시몬은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지 요즘은 시몬의 속내가 궁금하다. 옆에 산다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낙엽 지는 길을 따라 둘레길을 벗어나 산으로 오른다. 차중락의 노래 ‘가을 따라 가 버린 사랑’ 노래가 저절로 나오는 가을 풍경 속으로 깊숙이 들어선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립웁구나…” 이 가을 그리운 사람이 있다. 오늘은 떨어지는 낙엽 속에서 그리운 사람을 만나야겠다. 낙엽족도 되기 전에 서둘러 떠나 간 사람이라 더 그리운가 보다. 가을이 깊어 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