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원했던 내 모습… '조연' 송일국

배우 송일국(43)을 만나러 가면서 고구려왕 주몽이나 액션 영웅 마초남을 상상했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는 TV 프로그램 속 다정다감한 세 쌍둥이 아빠에 더 가까웠다. 그는 대답 전 오래 생각을 곱씹었고 열정적으로 설명했으며 성취에 대해선 "운이 좋았다" "큰 선물을 받았다"고 했다.

6일 개봉한 영화 '현기증'(감독 이돈구)에서 그는 어렵게 얻은 아이를 장모(김영애)의 실수로 잃는다. 온 가족이 서서히 광기(狂氣)로 물들어 간다. 주연에 익숙했던 그에겐 낯선 조연이다. 소심해 뵈는 보통 남자 역할을 몸에 꼭 맞는 옷 입은 듯 해냈다. 5일 서울 도산대로 수제 맥주 바 '쓰리 매너티'에서 만난 그는 "나이 마흔 넘어서야 연기에 조금 눈을 뜨는 것 같다"고 했다.

―조연이라니 낯설다.

"2010년쯤 슬럼프가 왔다. 주연을 오래 하다 보니 겉멋이 든 거다. 화려한 옷 입고 복근에 왕(王)자 새기고. 작품은 산으로 가고. 그러다 연극을 했다. 안중근 의사와 아들 안준생의 1인 2역을 맡은 '나는 너다'였다. 배우 일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바뀌더라. 연기에 대한 갈증도 커졌다. 사실 연극 2년 해봐야 전에 했던 드라마 한 회 촬영료도 안 된다. 그런데 돈으로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을 받았다. 이번 영화도 마찬가지다."

―무슨 선물?

"무대 오르기 전 늘 배우들이 함께 무사히 마치길 기원했다. 그때마다 난 아기 얻기를 기도했다. 거짓말처럼 마지막 지방공연 마칠 때쯤 아기가 생겼다. 그것도 세 쌍둥이. 이번 영화를 하면서도 많이 배웠다. 촬영 마치고도 한 달을 우울증에 고생했던 김영애 선배를 보며 배역에 미치는 게 뭔가, 진짜 배우란 뭔가 생각하게 됐다."

―오랜만의 복귀작이다.

"아내가 세 쌍둥이 낳느라 말도 못하게 고생했다. '돌 될 때까지 내가 키운다'고 약속했다. 근데 거짓말처럼 아이 낳고 1년간 작품이 안 들어왔다. 덕분에 열심히 아이들을 키웠다. 그 경험이 TV 프로그램 '수퍼맨이 돌아왔다'에서 큰 도움이 됐다. 참 인생 모르는 거다. 하하."

―영화에선 가족 전체가 서서히 미쳐간다. 인생과 가족도 원래 그렇게 허약한 걸까?

"나는 아이들과 있으면 늘 기도하게 된다. 너무 행복하니까 한편으로 두렵다. 작은 무언가에도 한 사람의 인생, 한 가족의 운명이 완전히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허약함을 지탱해주는 건 신뢰와 노력일 거다. 나는 사랑도 노력이라 생각한다."

―가족에 대한 영화라,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나는 정말 받은 게 많다. 과분하다. 이 빚을 다 어떻게 갚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목표가 아내에게 잘하는 것,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되는 것, 내 일에 충실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 이발소 데려가서 머리 깎이고 왔다. 애들 엄마는 정규직이고, 나는 비정규직이라 내가 시간이 더 많다. 하하하."

―배우로서 목표가 있다면.

"연극과 영화에서 나는 아직 신인이다. 첫 연극 때 드레스 리허설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모든 과정을 다 촬영했다. 집에 가면 확인하고 다시 연기를 해 본 뒤 잠들었다. 아침에 눈뜨면 처음부터 끝까지 대사를 쭉 읊었다. 아내가 깜짝 놀라더라. 이제야 조금 배우가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송일국은 삼류 양아치(플라이 하이)와 연쇄 살인마(타투이스트)로 출연한 영화 2편의 개봉도 기다리고 있다. 27일부터는 서울 신사동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연극 '나는 너다' 무대에 다시 오른다. 다음은 그의 오랜 꿈인 뮤지컬 배우. 돌꽃컴퍼니 윤석화 대표가 준비하는 영국 웨스트엔드 뮤지컬 '탑 햇(Top Hat)'에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