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소대끼차

나는 지금 거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가을이 깊숙이 들어와 있다. 아파트벽에 매달린 풍경이 운다. 십일월의 바람이 불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메말라 가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낙엽들이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오른다.

수십 수백의 낙엽들이 하늘로 오르는 장관을 보여주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낙엽들도 안다. 그들이 가야 할 길이 하늘이 아니라 땅으로 돌아가야 함을….

어쩐지 그냥 서서 바라보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서둘러 소대끼 가루에 물을 부어 소대끼차를 탄다. 안개 피어오르듯 김이 무럭무럭 나는 소대끼차에서는 깊고 고소한 향기가 코끝을 자극한다. 커피향이 도시향이라면 소대끼차는 시골향이요 고향의 향기다. 어느 순간 커피에 밀려난 소대끼차를 다시 찾게 된 것 요즘이다. 아마 나이가 들어가면서 귀소 본능의 발로이지 싶다.

소대끼차! 내 맘대로 만들어 내 맘대로 먹는 내가 붙인 차 이름이다. 거창하게 차 이름을 소대끼차라 했지만 소대끼는 강릉지방 토속어이다. 가마솥에 밥을 하고 난 후에 가마솥 밑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강릉서는 소대끼라 불렀다. 그 소대끼를 끓여 놓은 것을 우리는 흔히 숭늉이라 부른다. 내가 굳이 숭늉이라 부르지 않고 소대끼차라 부르는 것은 차의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누룽지를 만들 때 난 보통 누룽지보다는 좀 더 눌린다. 커피알을 볶을 때처럼,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깨를 볶았을 때처럼 볶아야 쓴맛을 없애고 고소한 맛을 좀 더 낼 수가 있다. 이 누룽지를 믹서에 갈아 가루로 내어 병에 담아 둔다. 그리고 물이나 차가 생각날 때면 한 스푼씩 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으면 구수하고 깊은 맛을 내는 소대끼차가 완성된다.

고소한 향기와 함께 김이 솔솔 피어오르는 소대끼차를 후후 불어가면 먹는 맛이란 커피에 비할 바 아니다. 어느 순간 커피에 밀려난 소대끼차는 이렇게 내 곁에 다시 찾아와 자리 잡았다. 내 집에 오는 손님들에게 난 이 소대끼차를 자주 내놓는다. 언제 어디서 먹어도 누구나 좋아하는 차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요즘 유행어 중에 슬로우 푸드라는 말이 있다. 햄버거로 상징되는 패스트푸드의 반대되는 말이다. 슬로우푸드는 느리게 만들어진 음식으로 시간과 정성을 다해 만든 음식을 말한다. 바쁜 생활 속에서도 제대로 된 음식의 맛과 향을 재발견함으로써 잠재된 미각과 전통을 보존할 수 있으며, 환경도 보존할 수 있다는 개념을 가진 말이다.  

그 슬로우푸드에 가장 적합한 것이 숭늉이다. 바쁜 생활과 전기밥솥의 발달로 우리 곁에서 어느 순간 멀어져 간 숭늉이다. 이 숭늉을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한다. 그리워하면서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시대가 발전함으로써 잃어버린 것이다. 편리함이 숭늉을 멀리 밀어냈다. 마시면 위장이 편해지는 소화제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다는 것을 알기에 유명 음식점에서는 후식으로 간혹 내놓기도 한다. 그 숭늉을 마시고 난 뒤 느끼는 느긋함과 찾아오는 행복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요즘 식후에 마시는 커피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다. 해롭다는 주장과 적당히 마시면 좋다는 말.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위에 그다지 좋은 음료는 아니란 것이다. 음료수로 숭늉을 마시면 위장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방에 앉아서 알맞게 식은 숭늉을 마셔본 적이 있는가? 그 시원하고 고소하고 깊은 맛은 어느 차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 숭늉을 끓일 때 나오는 끈적이는 액상은 요즈음 피부 관리에 좋다는 ‘콜라겐’성분이라고 하니 몸에도 좋고 미용에도 좋은 일석이조 아닌가.

거실 창밖에 바람이 다시 분다. 낙엽이 춤을 춘다. 낙엽 무용수들의 군무(群舞)를 보며 뜨거운 소대끼차 한 잔을 천천히 불어가며 마신다. 소대끼차의 향기가 거실에 가득 퍼진다. 내 몸의 갈증이 일순간에 가라앉는다. 시원한 느낌이 가슴을 타고 올라 머리까지 맑아진다. 참 이상도 하지. 뜨거운 것을 마시며 시원함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 민족만이 느낄 수 있는 감성이다. 이 감성을 이제는 도로 찾을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