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시(詩)를 부르는 두 개의 가을

아직 초록색인 잎사귀들이 발에 채일 정도로 보도에 수북했다. 지난 10월 중순께였다. 일본을 종단한 태풍의 간접영향으로 바람이 세찼기 때문이었다. 노랑 빨강 단풍으로 한 잎 두 잎 떨어졌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가을 정취를 선사했을까.

아쉬움에 슬며시 한숨이 새어나오려는 순간 초록 낙엽 사이로 뭔가 선명한 주황색이 눈에 띄었다. 아이 주먹만 한 작은 감이었다. 근처에는 감나무가 없는데 거센 바람에 날려 왔나. 그런데도 몇 군데 긁히기만 했을 뿐 온전한 모양으로 오도카니 앉아있었다.

자그마해서 깨지지 않을 수 있었겠지. 작은데도 잘 익어 저리 예쁜 색을 띠다니. 신통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삶에서 뜻하지 않게 태풍을 맞았을 때 우리도 저 작은 감 같을 수만 있다면….

'몸집만 불리지 말고 속으로 잘 여물어야 그럴 수 있다'고 작은 감은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아마 시인이라면 이런 느낌을 이내 시로 엮어내 이심전심으로 통하게 할 텐데. 집으로 가져와 책상 위에 고이 모셔둔 작은 감을 찬찬히 보면서 나도 몇 자 끄적여 본다.

손안에 든 시(詩)
 
인생의 가을에 접어들며 맞는 이 가을, 두 개의 가을을 사는 까닭인가. 나이 들면서 감성이 메마르고 삶이 무미건조해지다가도 가을만 되면 가슴이 시려지며 절로 시가 나올성 싶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쓰지 않던 시가 술술 써질 리 만무하다.

집 근처 도서관에서 마침 ‘내 마음에 들어온 시’란 주제 아래 ‘내 생애 첫 작가수업’을 시작한다기에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벌써 수업이 절반 과정을 지나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끝나게 된다. 나이 든 사람의 마음은 비슷한지 열댓 명의 참석자 중 대부분은 두 개의 가을을 사는 이들이었다.

인생을 정리하는 시집을 내고자 한다, TV 드라마에서 시를 자주 읊던 탤런트로 인해 시에 끌렸다는 70대의 남녀 어르신, 퇴직하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려 한다는 50, 60대와 문학소년 소녀의 불씨를 되살리고 싶은 30, 40대, 그리고 서른도 안 된 미모의 시인 강사까지 세대가 총망라된 시 공부 반이다.

그만큼 감성도 달라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해, 죽음을 앞두고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에 대해 털어놓는 시간에는 각양각색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수업 때마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준비해 오는 시와 음악에서는 더욱 취향의 차이가 도드라졌다.

그러나 시를 써보겠다는 마음은 똑같다. 과정을 마치고 나면 나도 웬만큼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담긴 마음들이다. 첫날 강사의 말 한마디가 그 희망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누구나 시를 쓸 수 있어요. 펴보세요. 우리 손안에 시가 들어있으니까요.”

왼손을 펴보니 손바닥에 진짜 ‘시’ 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그냥 봐 넘겼던 손금에서 새삼 글자 하나를 발견하게 된 것처럼 무심코 지나치던 일상에서 시를 건져 올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시를 써서 밥이나 먹겠느냐며 시에 대해 냉소적인 이들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고 말할 필요도 없이 시는 정말 밥이 된다. 더구나 대대손손 밥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중국 당나라 시대 시성으로 추앙됐던 두보(杜甫)에 버금가서 ‘작은 두보’로 일컬어지던 두목(杜牧)의 시가 대표적이다.

그의 시에 “길 가다가 좋은 술 파는 곳을 물어보니 소치는 아이가 저 멀리 가리키기를 행화촌이요 하더라”는 구절이 나온다. 덕분에 요즘도 산시성 행화촌의 ‘분주(汾酒)’란 술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고 한다. 술병마다 그 시구가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란 이야기를 중국 역사 교수로부터 들었다.

그런가 하면 2020년께 유망 직종 가운데 하나로 시인이 꼽히고 있기도 하다. 지식관리 컨설턴트, 나노 바이오 관련 기업 경영인, 예술가, 주문식 공급체인 설계 전문가 등과 더불어 시인이 앞으로 유망한 직업이 되리란 전망이다.

하지만 이제 막 시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자손까지 먹여 살리는 명시나, 돈벌이가 좋을 유망 직업으로서의 시인이 뭔 대수랴. 오히려 시집 가격이 국밥 가격 수준과 항상 비슷하게 형성되어 왔다는데 마음이 끌린다. 인생의 가을 봄 여름 할 것 없이 삶의 허기를 메워주는 것이 시이구나 싶어져서다.  

그런데 그 허기는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고는, 사랑받지 않고는 메워지지 않는 게 사람이고 보면,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고 사랑을 쓰는 게 시”라는 시인 강사의 시 정의는 아주 적확했다. 이미 기원전 3백여 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도 같은 맥락으로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시의 문외한에게조차 두 개의 가을이 시를 부르는 것도 쓸쓸해지는 만큼 사랑이 더욱 그리워지기 때문이리라. 에로스적인 사랑만이 아니다. 살면서 맺어온 수많은 관계에서 사랑했음과 사랑하지 못했음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삶에서 관계가 힘들어질 때 미움 대신 사랑을 선택하라고 했던 영성가 헨리 나웬의 권면이 떠오른다. 지나온 건 어쩔 수 없을지언정 이제부터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러면 플라톤의 말에 얹혀서라도 시는 절로 써질지 모른다. 아니, 굳이 쓰지 않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삶 자체가 시이지 않을까.

가을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고운 단풍으로 나뭇잎과의 관계를 마무리해 가는 까닭이다. 어떤 시인은 나무처럼 사랑스러운 시를 결코 볼 수 없으리라 노래했지만, 삶의 관계를 사랑으로 마무리해 가는 가을 인생이야말로 그대로 멋진 시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