株價 띄우고 社內현금도 줄어…自社株 매입 열풍

이달 들어 20일까지 국내 상장사들의 자사주 매입 금액이 금융위기 이후 최고치인 8000억원을 돌파했다. 엔저와 경기불황 여파로 상당수 대기업의 주가가 크게 떨어지자, 회사 돈을 들여서라도 주가를 방어하려는 움직임을 취한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 7월 최경환 경제팀이 들어서면서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쌓아둔 현금에 대해 과세할 방침을 명확히 한 것도 자사주 매입 규모를 늘린 데 일조한 것으로 분석된다. 배당과 함께 대표적인 주주 환원 수단으로 꼽히는 자사주 매입 열풍이 불면서, 국내에서도 기업의 주주친화적 경영 풍토가 자리 잡히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자사주 매입액, 금융위기 이후 최고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11월 한 달 동안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들이 사들인 자사주 규모가 8069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8년 8월(1조440억원) 이후 6년 3개월 만에 월별 최대 기록이다. 지난 10년간 월평균 자사주 매입액은 3400억원 수준. 지난달에도 상장사들이 총 5561억원어치의 자사주를 사들이는 등 최근 뚜렷한 자사주 매입 확대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자사주 매입(buy-back)은 배당금 지급과 함께 대표적인 주주친화 정책으로 간주한다. 사내에 쌓아둔 현금으로 자사주를 사서 시중에 유통되는 주식 물량이 줄어들면, 주당 순이익이 높아져 주가가 오른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그만큼 투자 수익을 얻는 효과가 나는 것이다. 실제 주가 급락에 시달리던 현대자동차가 자사주 매입을 깜짝 발표했던 이달 11일, 주가가 5.7% 급등하기도 했다. 하나대투증권 장희종 연구원은 "특히 최근의 자사주 매입 움직임이 과거와 다른 점은 SK·두산·삼성화재·한화생명·삼성증권·네이버 같은 대형주들의 매입이 많았다는 것"이라며 "기업 이익 회복이 신통치 않자, 자사주 매입으로 주식 수를 줄여 주가를 부양하려는 대형 기업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배당보다 자사주 매입 선호하는 기업 속내는…

국내 상장사들의 배당 성향이 세계 최저 수준이듯, 순이익 대비 자사주 매입 금액 비율인 '자사주 매입 성향' 역시 마찬가지다. 교보증권과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기업들의 평균 자사주 매입 성향은 62.6%에 달하는 데 비해, 국내 기업은 9.5%에 불과했다. 하지만 금융위기 직전 대비 2.4배로 늘어난 사내 유보 현금을 투자나 주주 환원을 통해 줄여야 하기 때문에, 자사주 매입 성향은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문제는 배당과 자사주 매입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을 택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배당금은 한 번 늘리기는 쉬워도 줄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에, 비상시 탄력적인 자금 운용을 위해 배당을 늘리는 대신 자사주 매입을 택할 것이란 얘기다. 교보증권 김지혜 연구원은 "현금 배당이 감소할 경우 투자자들이 기업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기 쉽다"고 지적했다.

또 자사주가 의결권은 없어도 적대적 인수·합병(M&A) 상황에서 우호세력에 팔아 의결권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고, 자사주를 보유할 경우 지주회사 전환에 도움이 된다는 점도 기업들엔 매력으로 꼽힌다. 지주회사 전환 때 분할된 사업 회사의 자사주는 분할 후 지주회사로 귀속이 가능해 지배주주의 지분 가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세금도 문제다. 현재 15.4%에 달하는 배당소득세보다 자본이득세(증권거래세·0.3~0.5%)가 훨씬 낮기 때문에 구조적으로도 자사주 매입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키움증권 서명찬 연구원은 "주주 입장에선 배당이든 자사주 매입이든 주주친화적 정책이 활발하게 시행된다는 점만으로도 투자 심리가 개선돼 전체 주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기대된다"며 "미국 기업들이 자사주 매입과 배당을 확대한 덕분에 시장 전체 자기자본이익률이 올라가 주가지수가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것이 좋은 예"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