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0년 된 이 물길은 쑤저우의 핏줄과 같았다.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배를 타고 돌아다녔는데 2층 집에서는 대나무 바구니를 내려 보내 물건을 샀다./쑤저우=박돈규 기자
"나나니 나려도 못노나니/ 아니리 아니리 아니노네…."
마르코 폴로가 700년 전 '동방의 베네치아'라 부른 도시에서 배를 타는데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드라마 '대장금' 주제곡을 중국 쑤저우(蘇州)의 사공이 부를 줄이야. '별에서 온 그대(별그대)'처럼 과거와 현재를 타임 슬립으로 넘나드는 기분이었다. 상하이에서 차로 두 시간 달려 쑤저우 톨게이트에 닿았을 때 반겨준 광고판에도 '별그대'의 김수현·전지현이 있었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쑤저우와 항저우(杭州)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고 중국인들은 말한다. 풍광이 그만큼 아름답다. 쑤저우는 운하와 정원의 도시였다. 전체 면적의 45%가 물로 덮여 있고 중국 4대 정원 중 2개가 여기 있다. 2500년 전 춘추전국시대에 오(吳)나라 수도였던 이 오래된 도시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졸정원(拙政園)의 가을
졸정원은 유원(留園)과 더불어 중국 4대 명원의 하나다. 1509년 명나라 때 지었다. 정치를 하다 물러난 귀족이 여기서 채소 심고 나무 가꾸는 것을 하루의 정치로 삼았다고 한다. '졸장부 정원'이라는 이름에서 회한 같고 덧없는 게 만져진다.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쑤저우엔 산이 없다시피 하다. 그런데 1만5000평(5만㎡) 졸정원에는 낮은 산이 많다. 연못을 만들려고 판 흙을 쌓아올린 것이다. 태호(太湖)에서 건져 올린 태호석이 곳곳에서 기묘한 형상을 뽐낸다. 정원의 5분의 3은 물이고 누각과 정자, 나무가 어울리며 경치를 완성한다.
반달형 미인교를 건너 안으로 들어가면 뱃사공이 연못에 배를 띄우고 젖은 낙엽을 건져 올린다. 졸정원 담 너머 보이는 탑까지 경치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借景)도 수려하다. 누각에 달린 창문 300개는 무늬가 제각각이다. 풍광도 사계절마다 다르다. 가을을 눈에 담고 있는데 가이드가 거든다. "주재원으로 쑤저우에 온 한국 사람들은 두 번 웁니다. 애먼 발령을 받은 것 같아 울고, 떠날 땐 헤어지기 싫어 울고."
회랑으로 이어져 비가 와도 관람할 수 있다. 연못과 전각을 잇는 다리가 지그재그로 꺾이는데, 양쪽 경치를 보여주려는 배려다. 견산루(見山樓)와 회랑은 멀리서 보면 용의 머리와 몸통 같다. 연꽃에 빗방울 듣는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었다는 정자도 있다. 운수대통의 상징인 대나무가 반겼다. 박쥐 다섯 마리가 목숨 수(壽)자를 받드는 바닥 장식 '오복봉수도(五福奉壽圖)'를 밟으며 행운을 빌었다.
◇물길 따라 스민 역사
한자 '소(蘇)'를 뜯어보면 풀과 물고기, 벼다. 쑤저우는 그만큼 풍족한 도시다. 교통수단은 배였다. 오나라 때 만들어진 운하(길이 53㎞)를 따라 집이 생겼는데 옛 건물들은 벽이 하얗고 기와는 검다. 종이와 먹을 상징한다. 장원급제에 대한 바람이 담겨 있다.
배를 탔다. 물길 좌우로 군데군데 계단이 물에 잠겨 있다. 예전엔 여기서 야채를 씻고 빨래를 하고 장사도 했지만 이젠 쓸모를 잃어 고요하다. 어느 계단엔 화분만 가득하다.
배를 대고 내리니 쑤저우의 인사동이라는 핑장루(平江路)다. 상점과 음식점이 즐비한 길 안쪽으로 2500년 다져진 골목길이 있다. 어느 대문엔 정월 초하루에 붙인 '복(福)'자가 뒤집혀 있다. 복을 집 안으로 들이려는 마음이다. 골목 한쪽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할머니 옆에 마통(馬桶)이 보였다. 쑤저우 처녀들은 시집갈 때 마통을 두 개 챙기는데, 하나는 쌀통이고 하나는 요강이라고 했다.
오나라 왕 합려의 무덤이 있는 호구산(虎丘山)은 호랑이 꼬리를 닮았고 산탕제(山塘街) 운하에 비친 야경은 홍등처럼 붉었다. 퉁리(同里)에서는 명나라·청나라 때 거리를 걷는 기분이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이웃해 있는 골목, 굽이쳐 돌아가는 창자 같은 물길, 오래된 정경이 간직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