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연극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연극을 보고 남산예술센터를 나온 때는 밤 11시가 가까운 차가운 어둠 속이었다. 영하의 날씨를 예고하는 드센 바람은 몸을 한겨울 강추위보다 웅크리게 했다. 그러나, 연극 무대를 통해 그동안 숨어있던 몇 개 단어들이 머리와 가슴을 헤집고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통에 드라마센터의 무대 열기는 아직 식을 줄 모른다. 아마, 평생을 두고 식어가지 않을까?

1921, 3.1, 8.15. 6.25, 4.19, 그리고 1968. 이는 김수영 시인이 겪은 격동기 역사의 숫자들이다. 48년의 길지 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는 한국 현대사 초입부터 몸으로 이겨내려 했던 한국의 지식인이었다. 그처럼 어둔 시대에 저항하려 했던 임화, 신동엽, 김지하, 김남주 등처럼 나와 상관없는 먼 거리감으로 살았던 시인들이 있었다. 물론, 지금에서야 그들의 흔적이 충무로나 명동 어디에 남아 있음을 느끼고 싶었던 것은 괜한 나의 욕심임이 분명하다.

세계 냉전시대의 피해자로서 희생양이 된 한국전쟁의 남과 북. 그 힘의 수레바퀴 파편이 된 김수영은 북측 의용군에 강제 동원된다. 우여곡절 끝에 집으로 온 그는 이미 불안과 공포 그리고 굶주림으로 심신이 허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다시 충무로 집 근처에서 경찰에 체포, 거제포로수용소에서 25개월 간 악몽 시간을 보낸다.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사회 자체가 이미 그에게는 감옥일 뿐. 부조리와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서 유일한 시의 힘을 펼 언론도 이미 그의 편은 아니었다.

번역 일 중심 생활로 직업과 현실을 견디면서, 진보당 조봉암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한 사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로 인한 4·19 혁명, 조용수 민족일보 사장을 간첩 혐의로 몰아 사형시킨 최초의 필화 사건 등을 목격한다. 그는 결국 시퍼렇게 눈을 뜨고도 깊숙이 들어가 함께 막아내지 못하는 처지를 시지푸스가 바위를 반복해 올리듯 몸으로 쓴 시로 승화시킨다.

과거의 김수영이 살던 상황과 현재 연극을 만들어 가는 현실을 다큐멘터리 형식의 연극 무대로 옮긴 극단의 연출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결국, 나의 과거가 현실을 만들고 있음을 어찌 부정하랴. 이는 사회 전체 뜻이 제대로 흐르지 않는 것을 보고도, 자신을 안위만을 위해 살아가는 지금 내 처지를 명징하게 느끼도록 하고 있다. 반성이란 누구나 미래를 위해 언제나 반복되고 있으니, 또 반성하라며. 그래야 조금 새로움이 보이는 것이라며.

과연, 지금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키며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시간과 장소와 사람이 바뀌는 상황에 따라 자신의 기준점을 옮기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지상정일 터이니 말이다. 아무리 인간이 가진 생존 본능이라는 단어들로 변명해도,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것이 몸과 마음 구석구석 존재한다. 다툼이란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나고, 그 끝마다 화해와 반성이 되풀이 되고 있음을 어찌할 것인가? 또한 되풀이 되는 과정에 살고 있는 나 자신을 또한 더 어찌 할 것인가?

연극이나 배우나 김수영이나 관객이나 그 중의 나나, 어쩌면, 인간이 안고 있는 고민, 원인과 결과를 따지는 고민이란 결국, '결승점이 없는 뫼비우스 띠 위를 달리는 것이다!’라는 답안지를 작성해 본다. 다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고민의 실타래 그 끝을 쥐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 끝에 서서 고민의 실타래를 바라보면서, ‘실타래 전체가 하나의 의미요, 나와 직면한 세계다’라고 느껴본다. 채점은 결국 나의 행동 하나하나 이어질 때마다, 내 스스로 매기는 것이 아닐는지.

이번 연극은, 아니 연극 같은 현실은, 우리의 삶을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가는 길이란, 아마도, 내 안의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는 결론 아닌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인간이 바라는 유토피아가 되도록 노력하는 일이 아름다운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젊은 날, 세상에 눈을 뜨면서 누구나 그러하고 싶다는 다짐을 한두 번은 했었으리라. 그 다짐을 되풀이하고 잊지 않기 위해 인간 사회에는 예술 행위를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억지춘향 격이라며, 지금 현실 속에 살아 있음을 나는 이런 말로 변명하고 있는 것이었다.

‘돈이 없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 더 편해져야 한다!’ 등등 사회생활의 보편적 습관에 익숙해져 있는 나는, 명분과 강압만 앞세운 국민교육헌장, 그 속에 나오는 ‘역사적 사명’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물론 속으로만 쓴 웃음을 지어보는 올해도 겨울은 오고 갈 것이다. 이 겨울도 그저 힘을 움켜쥐기 위해, 그 힘의 그늘에 안주하기 위해, 아니면 힘에 저항하기 위해, 그 모두 나를 위한 수단을 만들기 위해 살아갈 것이다. 이렇듯, 나는 그 무엇이 두려워, 이 감상문이 마음에 드느니 안 드느니 하면서, 진정 지금 이 작은 일에도 시시콜콜 못마땅해 하며, 내 삶을 허비하는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