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관찰사가 집무하던 강원 감영 내 ‘선화당’ 처마 밑에 탐방객들이 모여 있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터(基)뿐이다. 무덤뿐이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 패자의 흔적은 윤곽조차 희미하다. 지난달 28~29일 '승자의 미소, 패자의 눈물'을 주제로 강원 원주와 횡성 땅을 밟았다. 신라와 고려, 조선의 마지막 발자취가 묻은 곳이다. 조선일보와 교보문고, 국립중앙도서관 공동 주최 '길 위의 인문학' 마지막 탐방이었다.
◇패자의 눈물
아비는 폐서인(廢庶人)됐다. 아들은 왕이 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불타 죽었다. 조선 선조의 아내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살던 방 99칸짜리 저택에 닿자마자 비가 내렸다. 강사를 맡은 홍인희 강원대 초빙교수가 "하늘도 눈물을 뚝뚝 흘린다"고 말했다. 역모에 연루됐다는 누명으로 아비와 자식을 잃었다. 인목대비는 경기 안성 '칠장사'에 기거하며 족자에 이런 글씨를 썼다. "늙은 소가… 목이 찢어지고 가죽이 구멍 나 이제는 쉬고 싶구나." 저택 옆 김제남을 기리는 사당 '의민사(懿愍祠)'뒤편 부부의 합장묘가 있다. 묘비 앞 혼유석(魂遊石)이 비에 젖는다. 혼(魂)이 놀다간다는 이 돌 위에 탐방객들이 손을 얹는다.
누구나 죽어 묻히지만, 이 무덤은 좀 기구하다. 횡성읍 정암리에 있는 고형산의 묘역으로 간다.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였던 고형산은 평창과 강릉 간 대관령길에 일종의 고속도로를 닦았다가, 죽은 지 100년 하고도 8년이 지나 부관참시를 당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적이 고형산이 닦은 길을 타고 한양으로 곧장 진격했다는 이유였다. 시체는 허리와 목이 잘렸고, 무덤은 파묘됐다. 홍 교수는 "땅에 묻힐 자격조차 박탈하는 극형 중의 극형"이라고 했다. 훗날 무고는 밝혀졌으나, 혼백은 피눈물 흘린 뒤였다.
탐방객들이 광활한 법천사지 발굴터를 둘러본다. 여기서 곧 새로운 이야기가 발굴될 것이다.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세월 앞에 승자가 없는 모양. 원주에 있는 강원감영은 옛 관찰사가 묵던 곳으로, 궁궐 다음으로 큰 건물이었다. 사방이 40리(16㎞), 건물만 57채가 있었다 한다. 임진왜란으로 전부 불탄 것을 최근 복원했다. 사료관에 가니 516명의 역대 관찰사가 병풍에 빼곡히 적혀 있다. 밖엔 14기의 비석만이 살아남아 비를 맞고 있다.
◇승자의 미소
패자는 필연적으로 승자를 낳는 법. 원주 건등산, 아파트 앞 260m짜리 얕은 산인데 여기서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쳐부숴 세력을 키웠다. 여기서 후용리 방향으로 10리쯤 가면 견훤산성. 골짜기를 타고 못으로 쪼아 깎은 돌무더기가 무너져 있다. 1000년 묵은 돌 위로 자꾸 낙엽이 진다. 정상에 오르니 잇몸처럼 버티고 선 몇 개의 돌덩이가 과거 성곽의 자태를 드러낸다. 홍 교수가 "견훤성엔 뱀이 많으나 사람을 물지 않는다. 왕건에 패한 군사들이 뱀으로 환생했기 때문"이라 한다.
개선장군만 있는 건 아니다. 횡성군청 뒤쪽 '횡성 3·1공원'으로 간다. 강원 지역에서 가장 극렬한 독립운동이 일었던 횡성에서도 드센 투사가 있었으니 바로 김순이 여사다. 술집 주모였다. 부엌칼을 들고 일제 헌병에 맞섰고, 번 돈을 모두 독립 자금으로 내놓았다. 공동묘지에 이름 없이 묻혀 있던 것을, 횡성 사람들이 옮겨 1990년 묘를 만들었다. 탐방객들이 고개를 숙인다.
◇역사는 도도히
오른쪽에서 섬강, 왼쪽에서 남한강이 내려와 합쳐진다. 배향산의 깎아지르는 절벽이 강과 맞닥뜨리며 수평과 수직을 교차한다. 원주 흥원창이다. 고려시대에 있던 조창(漕倉)으로, 한때 쌀 2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평저선 21척이 배치돼 있었다 하나, 지금은 오리 떼뿐이다.
법천사지로 흘러간다. 한때 규모가 6만6115㎡(2만 평)에 달했다는 큰 절이다. 임진왜란 때 전소해 탑과 탑비 등 돌 유물만 남았다. 최고급 걸작으로 평가받는 지광국사현묘탑은 서울 경복궁에 모셔져 있고, 법천사지엔 4.5m짜리 탑비만 서 있다. 거대한 발굴터에 주춧돌 따위의 석재가 뼛조각처럼 널려 있어 황량해 보이나, 여기서 지난달 6일 금당(金堂·본존불을 안치하는 중심 건물)과 함께 금당지 전면에서 두 기의 탑지가 발견됐다. 보이지 않을 뿐, 없는 게 아니다. 손길 닿는 데마다 과거가 자꾸 출토된다.
5년간 이어져 온 '길 위의 인문학'은 정말 길 위에서 끝을 맺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칩거한 마을 원주 '손위실(遜位室)' 앞 도로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탐방객 박명기(66)씨가 "흐르는 세월 앞에 영원한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고 자작시를 썼다. 서울로 가는 버스, 길이 앞으로 뻗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