件마다 借名(차명)금지 확인서 받자 "범죄자 취급하나"

회사원 김모(35)씨는 지난 4일 연금형 펀드에 가입하려고 은행을 찾았다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다. 수수료가 싼 '펀드 슈퍼마켓'을 이용하기 위한 새 통장을 개설하려는데 창구 직원이 '불법·탈법 차명 거래 금지 설명 확인서'라는 이름의 서류를 내밀었다. 직원은 "자영업자 같은 분들이 차명 계좌를 써서 탈세할 때가 있어서 차명 거래를 하면 처벌을 받도록 법이 바뀌었다. 이 설명을 들었다는 확인서이니까 여기 서명하시라"고 말했다. 김씨는 통장 개설을 위해 한 번, 펀드 가입용 사이버 계좌를 트기 위해 다시 한 번 '불법·탈법 목적의 차명 거래를 하면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는 서류에 서명해야 했다. 그는 "간신히 모은 현금으로 세액공제나 받아보려고 하는데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은 것 같아 당혹스러웠다. 직원에게 같은 서류에 두 번씩이나 서명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따졌더니 '원래 법이 바뀌면 절차가 복잡해지는 것이니 그런 줄 아시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차명 거래 금지법'(개정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으로 다른 사람 이름을 빌려 쓰는 차명 거래가 금지된 후 한 주가 지났지만 금융 현장에선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은행들이 후일 책임 소재를 가리게 될 경우를 대비해 '불법·탈법용 차명 거래가 아니다'라는 확인서를 일제히 받기 시작하자 일부 고객은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느냐'며 불만을 터트리고 있고, 불법·탈법 여부를 가리는 기준을 잘 몰라 불필요하게 예금을 해지해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개인들 참고할 만한 자료 없어 혼란"

경기도 일산에 사는 은퇴자 황모(67)씨는 지난 3일 은행에 가서 30대 자녀 두 명 이름으로 각각 1000만원씩 가입해둔 세금우대 예금을 해약했다. 만기를 채우지 못해 금리는 거의 받지 못하는데도, '차명 거래를 하면 벌금을 수천만원 낼 수도 있다'는 보도를 보고 겁이 나서 내린 결정이다. 황씨는 "이래저래 허용되는 범위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불안한 마음에 일단 다 해약하기로 했다. 부자들은 PB(프라이빗뱅커)나 세무사들과 상의해서 이미 재산을 다 정리해 놓았다는데 딱히 물어볼 곳이 없는 서민이나 중산층만 기준이 뭔지 헷갈려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은행연합회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세금우대 금융상품의 가입한도 제한을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계좌를 쓰면 이는 불법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자녀에게 세금을 안 내고 증여할 수 있는 한도인 5000만원까지는 차명 거래를 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도 있다. 한 시중은행 지점장은 "헷갈려 하는 고객 중엔 '최대한 안전하게 가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하다. '비과세 증여 한도까지는 괜찮다'고 안내는 하고 있는데, 차명보다는 실명 계좌가 원칙이기 때문에 은행 입장에선 '금리를 깎이면서까지 차명 예금을 중도 해지하지는 마시라'고 적극적으로 만류하기도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융 소비자들이 직접 차명 거래 허용 범위를 '공부'할 자료가 없다는 것도 문제다. 은행연합회가 금융위원회의 감수를 받아 질의·응답 형식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은행에 배포하기는 했지만, 직원용일 뿐 금융 소비자가 이를 찾아 열람할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는 실정이다.

◇빠져나간 돈 금·보험·5만원권으로

한편 차명 거래 금지로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은 금(金)·보험·현금 등으로 이동 중이다. 한국금거래소에 따르면 골드바(금괴)가 올해 1~11월 모두 1002㎏ 팔려 지난 한 해 팔린 물량(704㎏)을 넘어섰다. 올해 1월 68㎏, 2월 52㎏ 정도였던 골드바 판매량은 차명 거래 금지가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8월 103㎏을 기록한 후 9월 126㎏, 10월 132㎏, 11월 137㎏으로 계속 증가 중이다. 한국금거래소 송종길 영업이사는 "차명 거래 금지와 금값 하락이 겹쳐 골드바에 돈이 몰리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0년 동안 계약을 유지할 경우 비과세 혜택이 있는 저축성 보험에 돈을 묻어놓는 사람도 늘었다. 삼성·한화·교보생명 등 이른바 생명보험업계 '빅3'의 비과세 저축성 보험 보험료(초회 기준)는 8월 2651억원에서 10월 3526억원으로 1000억원 가까이 증가했다. 저축성 보험은 '계좌'가 아니라 '계약'이기 때문에 이번 법 개정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금고(金庫)에 넣어놓기 편리한 5만원권의 인기도 계속 높아지고 있다. 한 시중은행 PB는 "부자 중엔 차명 계좌에서 뺀 돈을 다른 투자처에 즉시 넣지 않고 일단 현금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다음 '전략'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12년 62%, 2013년 45%였던 5만원권 환수율(발행한 금액 대비 환수액 비율)은 올해(1~10월) 26%까지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