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

12월 출근길 첫날. 창밖에 눈이 내린다. 첫눈이야 얼마 전에 내렸지만 나는 보지 못했으니 오늘이 첫눈 내리는 날이다. 마음이 약간은 들떠 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정성껏 출근 준비를 했다. 거울에 비친 내가 봐도 난 아름답다. 발걸음도 가볍게 엘리베이터를 탔다. 사 층에서 유치원 꼬마가 엄마 손잡고 올라탄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꼬마가 잡고 있던 엄마 손을 뿌리치더니 얌전히 두 손을 모으고 90도로 허리를 굽히는 폴더 인사를 한다. 티 없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데 마음속 어디선가 바위 덩어리 하나가 쿵 내려앉는다. 당황스럽다. 할머니라니. 꼬마의 엄마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멋쩍게 눈인사를 한다. 마주 보며 웃어주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어떤 말을 기대한 걸까? 나도 모르게 들뜬 마음이 아줌마 소리를 기대했었나 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나는 나인데 왜 나는 자꾸 부정을 하려 하는가. 겨우 호칭 하나 변한 것뿐인데 왜 그것이 충격받을 일인지 내가 사람이 아닌 무엇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돌이켜 보면 엄마는 늘 나이 들어 있었고 할머니는 늘 할머니였다. 나이를 먹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사람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리지도 않고 입이 찢어지도록 하고, 말은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것처럼 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자신의 부족한 것을 감추려고 하는 사람. 그래도 아직은 여자의 마음이 조금은 남아있어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파마를 바글바글하게 했다. 얼굴에 파운데이션으로 떡칠하고 붉은 립스틱을 두껍게 바르며 주름살을 필사적으로 감추려고 발버둥 치는 것들이 딱하기까지 했었다.

여고 시절엔 난 그런 교양 없는(?) 아줌마들이 싫었다. 경멸했다. 살이 찐 거대한 몸을 뒤뚱거리며 먹을 것에 환장한 듯 먹어대는 모습도 보기 싫었고 김치를 썰다가 손으로 집어 먹는 모습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랬던 내가 오늘 아침에도 김치를 썰다가 그냥 손으로 쭈~욱 찢어 입을 따악~ 벌리고 먹는 것을 본 딸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괜히 민망해져 ‘야, 너도 나이 먹어 봐. 이렇게 먹는 게 얼마나 맛있는데…. 너처럼 깨작이고 먹으면 오던 복도 달아나.’ 조금은 민망해진 마음을 감추기 위해 얼렁뚱땅 자기 합리화를 시킨다.

좋게 보면 남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졌다고 할까? 조급함이 사라지고 마음에 여유가 찾아왔다고 할까. 반복된 일상들이 가져온 느긋함이라고 할까. 그러나 둘러보면 자기 관리를 너무나 잘해 같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고 아름답고 지적이고 우아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부지런히 운동하고 문화센터를 돌면서 무언가 배우러 다니며 교양을 쌓은 아줌마들이다. 내가 아무리 직장생활 때문이라 부정하려고 해도 그건 한낱 변명에 불과할 뿐이다.

그렇다고 나이 먹는다는 것이 꼭 나쁘지는 않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도 나이가 들어서부터이다.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고 효자라고 자부했던 자식들의 단점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고 아들만 좋아했다고 미워했던 엄마의 느린 걸음걸이가 굽은 허리가 눈에 들어와 마음 쓰인다. 내 자식들을 키울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손자에게서 발견하며 탄성을 지르며 애틋해한다. 잊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내가 먼저 다가가며 안부를 전한다.

나이가 들면 눈은 점점 어두워져 돋보기를 쓴다. 그러나 마음의 눈은 점점 밝아져 보이는 않던 것들이 보인다. 봄이면 파릇파릇 올라오는 새싹이 눈에 들어오듯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며 감탄한다. 건망증도 시시때때로 찾아와 혼란에 빠트리지만 잊고 살았던 사람들은 또렷이 기억해 찾아 나선다.

뱃살이 늘어나는 것만큼 남의 탓이라고 원망했던 일들이 쌓여갔는데 어느샌가 눈 녹듯 사라져가고 있다. 세상 탓이 아니라 내 탓이라는 마음이 자라기 시작한 탓이다. 나이 들수록 키는 작아지는 데 세상을 보는 키는 점점 자라난다. 나 중심의 세계에서 나의 밖 세상으로 키가 커간다.

내가 여고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던 일어나고 있다. 불어난 뱃살만큼 너그러워지고 느긋해지고 여유로운 할머니가 되어가고 있다. 좋은 현상이다. 사 층 꼬마가 앞서 내려 종종걸음으로 유치원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돌아선다. 한 손은 엄마 손을 꼭 잡고 작별 인사를 한다. ‘할머니, 안녕히 가세요.’ 앙증맞은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한다. 내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