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닫은 고령층… "贈與(증여) 장려해 돈 돌게 하자"

금융권엔 돈이 넘쳐도 돈이 실물경제로 흘러들어 가지 않는 '돈맥 경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돈맥 경화 현상은 세대 간 자산 불균형에 기인하는 측면도 있다. 청년층은 소득이 적어 쓸 돈이 없고, 중장년층은 높은 거주비와 교육비 부담 탓에 소비 여력이 없는 반면 고성장기에 자산을 축적한 노년층은 장수 리스크와 증여세 등 세금이 무서워 현금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최근 노년층을 대상으로 증여를 장려하는 정책을 쏟아내고 있는 일본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2년 주택취득자금 증여 비과세, 2013년 교육비 증여 비과세에 이어 내년부터는 육아·출산비 증여 시 세금을 면제해 주는 정책을 시행할 예정이다. 세제 측면에서 화끈하게 지원해줘서 고령층에 편중된 자산을 젊은 층으로 이전시키고 소비와 투자를 늘리겠다는 전략이다.

강창희 트러스톤연금포럼 대표는 "어느 사회든 경제가 활성화되려면 젊은 사람에게 돈이 흘러가야지, 노인층에 고여있으면 경제는 활기를 잃고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김근호 하나은행 상속증여센터장도 "우리나라의 상속·증여세율 부담(최고 50%)이 높다 보니 세금이 없는 캐나다·호주, 싱가포르 등지에 가족 이민을 가서 자산 이전을 완료하고 돌아오겠다는 거액 자산가들이 늘어나고 있다"면서 "국부(國富) 유출을 피하려면 현실성 있는 세대 간 자산 이전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日, 증여세 면제해 자산 이전 촉진

일본은 고령층 자산이 후대에 옮겨질 수 있게끔, 증여를 둘러싼 다양한 비과세 제도를 내놓고 있다. 우선 2012년 일본은 자녀·손주의 주택구입자금 중 1000만엔까지 증여세를 면제해 주는 제도를 시행했는데, 지금은 주택 구입자 10명 중 6명꼴로 활용할 정도로 보편화됐다. 지난 2013년 4월엔 부모·조부모가 자녀·손주에게 교육비 용도로 증여하면 1500만엔(약 1억4000만원)까지 비과세를 해주는 제도도 선보였다. 부모·조부모가 '교육자금계좌'를 열어 돈을 넣어두면, 자녀·손주가 교육비로 쓴 영수증을 금융회사에 제출하고 꺼내 쓰는 방식으로 운용된다. 증여해주면 돈을 헛되이 써버릴까 우려했던 고령자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으면서 1년여 만에 6000억엔(약 5조5700억원)이 넘는 자금이 모였다. 내년엔 자녀·손주의 육아·출산·결혼 비용에 대해 1000만엔까지 증여세를 면제해 주는 제도도 시행할 예정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고령층에서 소비 의욕이 왕성한 젊은 세대로의 자산 이전을 촉진해 경제 활성화를 꾀하려는 목적이 있다"면서 "내년부터는 상속세 최고세율이 50%에서 55%로 높아질 예정이어서 생전 증여에 대한 관심은 더욱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고령층, IMF 때보다 지갑 더 닫아

일본과 유사한 세대 간 자산 이전 촉진 정책은 사회적 저항이 커서 도입이 쉽지는 않다. 결과적으로 빈부 격차를 확대할 것이란 비판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월 류성걸 새누리당 의원은 조부모가 교육비 용도로 재산을 물려주면 최대 1억원까지 증여세를 면제하는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지만 여론 뭇매를 맞아 바로 철회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한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질 위험이 커지고 있고, '돈맥 경화' 현상이 심화되는 만큼 비상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특임교수는 "세제 장벽 때문에 고령층 자산이 외딴섬처럼 갇혀 있는데 이를 다른 세대로 환류시킬 수 있는 정책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한국 노인들의 자산은 점점 늘고 있지만, 이들의 지갑은 오히려 굳게 닫히고 있다. 여생은 길어졌는데 자산 가격이 오르지 않으니 불안하고 자식들에게 자산을 물려주고 싶어도 세금이 무서워 돈을 움켜쥐고만 있기 때문이다. 60세 이상 고령층의 소비 성향(가구가 벌어들인 소득 중 얼마 소비하는지 보여주는 지표)은 지난 3분기 66.6%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IMF 외환 위기가 닥쳤던 1997년 3분기(66.7%)보다도 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