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마음의 밭에서

춥다. 거리에 서걱거리는 낙엽이 뒹굴고 있다. 갈 곳 없어 바람에 뒹구는 낙엽들이 내 마음 같다. 아버지 기일 미사를 신청하고 돌아오는 마음이 갈 곳 몰라 거리에서 서성인다. 어디쯤에 계신지 알고 있다면 한달음에 달려 갈 텐데 갈 곳이 없다. 괜스레 발밑에서 구르는 은행잎을 툭 걷어찬다.

걷어차인 은행잎이 마음밭에 닿는다. 빗질이라도 해 놓은 듯 적막함마저 감도는 빈터에 바람 한 줄기 일렁이며 지나간다. 한 줄기 바람에 호수는 파문이 인다. 아버지의 얼굴이 거기에 있다. 흘러가는 구름이나 떨어지는 낙엽 하나까지 잊지 않고 오랫동안 반추하는 속 깊은 물이다.

그립다. 잊고 살았던 아버지에게로 마음이 흘러 그리움이 물이 되어 흐른다. 평생을 자식 위해 살다 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다. 소리 내어 흐르다가 여울목에 머물다가 출렁이는 소용돌이로 휘몰아치다가 어느 순간 잠잠히 가라앉아 호수가 된다. 오늘같이 그리움이 넘쳐나는 날이면 오래도록 그 호숫가에 머문다.

그리움! 알듯 모를 듯한 향기가 온몸을 휘감아 오면 가질 수 없는, 닿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일들이 마음을 흐트려 놓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럴 땐 차를 마시는 게 제격이다. 낮은 온도의 물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찻물을 우려내야 한다. 끓는 물을 숙우(찻물을 식히는 그릇)에 부어 따끈따끈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찻잎을 넣어야 맑고 향기로운 차를 마실 수 있다.

그리움도 이처럼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리움이 향기로운 사랑으로 승화하려면 사랑을 마음밭에 담아 꽁꽁 봉하여 놓고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인가 발효가 되고 숙성이 되어 향기로운 사랑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거리에 서걱거리는 낙엽을 마주 할 때, 차 한 잔에 목마름을 가라앉힐 때, 술 한 잔에 마음이 비어 갈 때, 그리움은 향기가 되어 그대를 찾아올 것이다.

머나먼 곳 하늘 끝
손닿을 수 없는 그대도
이럴 땐 내 안에 든다

그리움이 아름다운 시가 되는 순간이다. 닿지 않는 사람이라도,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이때 만큼만은 내 곁에 돌아와 나를 다독인다. 한때는 기다림에 목말라 누군가를 미워 한 적이 있다. 그런 내가 나를 미워한 적이 있다. 진득하게 참지 못하고 끓어올랐다. 어떻게든 내 곁에 두어야 직성이 풀렸다. 어리석음이다. 사랑이란 것이 내 곁에 잡아둔다고 영원히 내 곁에 있으리라는 착각이 빠진 탓이다. 그 착각은 상대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게 하고 끝내는 나를 좀 먹었었다. 너무 젊었던 탓이다.

요즘 내 마음밭에는 많은 그리움이 산다. 담담한 색깔로 퇴색되어 서로가 서로를 다독이며 사이좋게 살고 있다. 비록 바래고 향기마저 옅어진 그리움이지만 그리움의 편린들이 한 장의 추상화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언뜻 보면 뭐가 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마음이 가라앉는 날, 마음밭에 찾아들면 그리움은 한 폭의 추상화로 아름다운 향기로 나를 반긴다.

아버지가 마음 밭 호수 속에서 선명히 떠오른다. 얼굴 가득 환하게 웃으신다. ‘사는 게 힘들지?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거야. 좋은 날보다 힘든 날이 더 많지. 그래도 고맙지. 길은 언제나 있거든….' 그때, 그 젊었을 때 나에게 들려주시던 말씀을 나직이 들려주신다. 가만가만 다독인다. 이게 힘이다.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마음밭에 사는 사람들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