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스토리] 난관 앞에서 펴보는 나의 옛 詩… 예전의 내게서 용기 얻어

'싸락눈 내리던/ 겨울 해질녘/ 할머니 치마폭에/ 찹쌀 한 바가지/ 울 엄니 눈물이었습니다.' 해마다 이맘때면 떠오르는 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풀어낸 나의 졸시(拙詩) '쌀'의 전문(全文)이다. 싸락눈이 내리던 겨울 해질녘, 고된 농사일로 평생 땀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현기증을 보았고, 땅이 꺼지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고된 농사일로 힘겨워하시던 이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란 내가 이제 신협중앙회 회장이라는 무거운 자리에 오르게 됐으니 감사하기만 하다. 33년 신협에 몸을 담았던 지난날을 돌아보면 사회생활의 거친 고비마다 나에겐 시(詩)가 힘이 되어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를 읽고 처음으로 마음이 설렜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담임이자 국어선생님이셨던 강석근 선생님('한국인'이라는 장편소설로 등단한 소설가)이 소월의 '진달래꽃'을 한번 낭독해보라고 시킨 적이 있다. 시를 읽고는 마음이 어찌나 두근거렸던지…. 그 시가 아주 좋아 나는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헌책방에서 간신히 구해 항상 팔에 끼고 다니며 읽었다.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나는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거창하게 마음을 먹고 틈날 때마다 시를 끼적거리곤 했다.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문소월'이라며 놀렸다.

청춘의 열정에 시심(詩心)이 더해진 시절이었다. 나는 20대 때 군산대 국문과 교수셨던 고헌 교수님이 군산의 문청(문학청년)을 위해 만든 '석조문학동인'의 창립 멤버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에 푹 빠져 살던 어느 날 나는 석조문학동인의 회원 중 한 명이 추천한 시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멘토를 만났다. 조선 중기 황진이와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천재 여류 시인 매창이었다. 매창은 '이화우(梨花雨)' 같은 감성으로 가득한 시로 유명하지만 나는 매창의 삶에 대해 알아갈수록 더 빠져들었다. 매창은 가진 자의 횡포에 대해서는 매섭게 저항했고, 약자에 대해서는 살가운 시선을 품은 예술가였다는 것을 그가 남긴 시와 여러 기록을 통해 알게 됐다. 이처럼 시는 시간과 공간의 벽을 넘어 옛사람들의 지혜와 용기에 마음을 닿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 졸업 후 '경성고무'에서 일했던 나는 다니던 둔율동 성당의 안복진(요셉) 신부님으로부터 '유명무실해진 둔율신협을 한번 맡아서 살려보라'는 권유를 받고 신협과 인연을 맺었다. 요셉 신부님은 금융 공동체인 신협에 큰 애정을 가지고 계셨고, 그 열정이 나를 움직여 새로운 일에 도전하게 만든 것이다. 나름의 사명감으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모든 일이 순조롭지는 않았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는 시를 쓰며 마음을 다스리려 애썼다.

가장 가슴 아팠던 때는 1990년대 말 닥친 외환 위기로 신협이 5~6년에 걸친 가혹한 구조조정을 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1600개 정도 있던 신협 중 수백 개가 문을 닫았다. 후배, 선배, 동료를 떠나보내며 슬픔의 나날이 이어지던 와중에 충남대신협을 만든 한국신협운동의 든든한 원군이자 정신적 지도자였던 전철환 한국은행 총재님이 세상을 뜨는 슬픔까지 겹쳤다. 나는 당시 '당신은 우리들의 큰 스승'이라는 추모시를 쓰며 눈물을 삭였다. '조금은 어리석고 고지식해도/ 서로 우애하며 손에 손잡고/ 희망을 만들어가라고…' 고통과 슬픔 속에서 쓴 그 시는 이후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다시 꺼내보며 금융인으로서의 다짐을 되새기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2010년 신협중앙회 회장직에 도전했다가 고배(苦杯)를 마셨을 땐 석 달이 넘도록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일을 손에 잡지 못했다. 당시 잠을 이루지 못할 때면 나는 옛 시를 꺼내보기도 하고 새벽녘 시를 끼적이기도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요즘도 힘들 때마다 그때 쓴 시를 다시 꺼내보곤 한다. 그리고 망연자실하던 과거 나의 모습을 떠올리곤 웃음을 짓고 다시 기운을 차린다. 모든 일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또 슬픈 일이 지나고 나면 즐거운 일도 있는 법 아닐까. 이처럼 과거에 쓴 시를 통해 '예전의 나'에게서 위로와 용기를 얻는 것도 시작(詩作)의 즐거움 중 하나이리라.

많은 사람들은 금융은 돈을 다루는 일이라 딱딱하기만 하고, 금융회사의 경영자는 냉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나는 예술가의 감수성이 경영자에게 필요한 창의적 에너지와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인재에 대한 투자와 기업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는 생각도 든다. 딱딱하기 마련인 금융회사의 문화를 바꾸기 위해 나는 지난 3월 신협중앙회장으로 취임한 후 직원 10여명을 DJ(디스크자키)로 선정해 아침·점심·저녁으로 음악 방송을 진행하고 있다. 체육대회로 일관하던 회사 행사는 뮤지컬 관람으로 바꿨다. 시를 통해 알게 된 예술적 감동을 직원들과도 나누고 싶어서였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12월 나는 매창을 그리며 함박눈이 배꽃처럼 내리는 내소사(전북 부안군 소재. 매창과 연인 유희경이 시와 노래를 나누던 장소)를 걸을까 한다. 건조한 삶에 촉촉한 감수성이 끊이지 않게 해준 매창에 대한 나의 작은 보답으로 쓴 한 편의 시로 한 해를 갈무리하는 것도 좋으리라. '오늘 밤도 그대 명주저고리 앞섶에, 푸른 달빛 스치면, 맑은 시심 우려낼 수 있을까?/ 내소사 대바람 소리가, 겨울 하늘 아래 가득한데, 국화주 익는 향기도 미련 없이 떨쳤는가?/ 세월 흘러 잊힐 법도 하련마는, 그대의 향기 눈 속에, 더욱 붉게 퍼져가네.'

[문철상 회장은 누구인가?]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문철상 신협중앙회장은 33년 동안 신협에서 일한 정통 '신협맨'이다. 서해대 미술과를 졸업하고 전주대에서 경영학 석사, 군산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군산대건신협' 직원으로 신협에서 일을 시작해 군산대건신협 전무, 이사장, 신협중앙회 이사 등을 거쳐 올해 3월 선출직인 회장에 취임했다. 회장직에 세 번 도전한 끝에 당선된 그는 신협 역사상 첫 신협 직원 출신 회장이다. 시(詩)와 사진에 조예가 깊어 3년 전 '계간문예' 신인문학상을 받고 등단해 '공식' 시인이 됐고, 틈틈이 군산대 미술학과 등에서 사진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