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匠은 말한다] 새벽 108拜 후 작업… "사람 운명이 담겼잖아요"

천수관음상과 달마상 서각(書刻·나무판에 새긴 글과 그림), 직육각 돌판에 깨알같이 경구를 새긴 전각(篆刻), 조선 어보(御寶)와 명문가 수결(手決) 복원작, 그리고 각종 서예 작품….

인장(印章) 공예 '대한민국 명장'인 류철규(60)의 작업장 '성호사'에 전시된 작품은 도장에 한정되지 않는다. 새벽에 일어나 108배를 올리고 시작하는 그의 주업(主業) 인장은 낮 12시를 넘기는 법이 없다. 작업량도 하루 2개 이하로 제한한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기 때문에 물량 맞추느라 서둘러선 안 되기 때문이다. 대신 오후에는 서각·전각·서예 등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한국서예협회와 한국서화작가협회 초대 작가이기도 했다. "도장쟁이를 넘어 예술가가 되라시던 스승님 덕이죠."

류철규는 열여섯 살이던 1970년 호구지책으로 인장에 입문했다. 고1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졸지에 가장이 되자 공부를 포기하고 대전의 인장가 이석성 문하에 들어갔다. 월급은커녕 숙식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 시절이다. "처음 3년간 한 일이라곤 청소와 칼 가는 일 정도였죠. 매일 밤 스승님 작품을 흉내 냈어요." 그가 몰래 판 인장들을 본 스승은 그를 제대로 가르치기로 맘먹는다.

"그런데 '5분 만에 도장 파는 기술'이 아니라, 천자문(千字文)을 주시더군요. 한학과 서예를 익혀야 제대로 된 인장을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천자문을 떼고 논어·맹자에 시경·서경까지 읽었어요.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 5가지 글씨체 익히는 것도 힘들었지만, 이걸 다 거꾸로 쓰는 어려움은 상상하기 힘들 겁니다." 이석성은 류철규를 이름 있는 다른 스승에게 보냈다. 전각과 서각은 거기서 배웠고, 입문 10년 만인 1980년 독립했다.

류철규는 "인장은 운명과 혼을 담은 예술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작에 앞서 의뢰인 사주부터 살핀다. 성정과 체질에 맞는 도장을 만들기 위함이다. "재료도 비싸다고 좋은 게 아닙니다. 어떤 이는 상아(象牙)가, 어떤 이는 흑수우(물소뿔)나 벽조목(벼락 맞은 대추나무)이 맞아요. 부드러운 성격의 사람에겐 강한 서체로 새깁니다." 그 뒤 23년 지난 2003년 마흔아홉에 대한민국 명장에 선정됐다. 서예의 소전체와 인장에 쓰는 전서체를 결합해 그만의 서체도 만들었다. "제 인장은 위조가 불가능해요. 시작한 이상 최고 자리에 올라야지요."

그의 인장 중에는 수백만원 고가품도 있다. 하지만 20년 전부터 인장은 사양길이다. 날인 대신 서명이 자리 잡으며 수요가 급감했다. 게다가 도장 파는 기계가 등장해 몇 분이면 뚝딱 찍혀 나온다. 당연히 줄지어 업계를 떠났다. 한때 30개 넘는 도장집이 운집했던 옛 충남도청 앞에도 남은 곳은 그의 성호사뿐이다. "타격이야 없지 않지만…. 어차피 하루 두 개 만들잖아요. 허허."

그는 대신 인장 문화 알리기에 시간을 쏟는다. 대전권의 명장들과 매년 가을 '명장·장인 작품전'을 연다. 1985년부터 12년간은 새마을지도자를 맡아 소년·소녀 가장 돕기 활동도 벌였다. "제가 젊은 날 '도장 감옥'에 갇혀 살았잖아요. 바깥세상, 남의 일에 너무 무심했어요. 세상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닌데…."

그는 강의실을 마련해 시민에게 인장 기술을 가르치고 있다. 근래 캘리그래피가 인기를 끌며 문자 디자인의 하나로 수제(手製) 도장을 배우려는 사람은 있지만, 전통 인장으로 승부하겠다는 사람은 없다. 전승해 줄 제자가 없는 것이다. "인장박물관을 만들 겁니다. 전통 인장부터 새롭고 독특한 인장까지 모아,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잊지 않게 하고 가능성도 깨닫게 하고 싶어요." 그러다 보면 의욕 있는 제자도 나타나지 않을까 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