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팥죽

춥다. 살을 에는 추위가 십이월로 들어서자마자 기승이다. 갈 길 몰라 헤매던 가랑잎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골목길마다 꿈을 가득 안고 내렸던 눈들이 기절한 채 얼음으로 누워 있다.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싶었을 눈들이 기습 한파에 순식간에 기절한 얼음 위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간다. 반들반들 윤기마저 흐른다. 모두들 조심 조심이다. 그 얼음이 언제 눈 부릅뜨고 일어나 걸어가는 발길을 잡아채 내동댕이칠지 몰라 조심 또 조심이다.
 
그 얼음 위로 다시 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얼음 위를 조심조심 걸어 재래시장에 들어선다. 많은 사람들이 북적인다.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활기가 넘친다. 요즘 보기 드문 재래시장 풍경이다. 이 시장에만 오면 모든 것들이 펄펄 살아 움직인다. 유난히 한 가게에 사람이 몰려 있다. 궁금하다. 사람 틈을 비집고 고개를 디밀었다.
 
팥죽이 끓고 있다. 순댓집이 문을 닫고 죽  이 생겼다. 팥죽 속의 밥알들이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서로가 서로의 등을 비비고 있다. 비비면 비빌수록 밥알들이 허물어지고 풀려져 간다. 밥알들이 나를 내려놓아 허물어트려 남의 속을 편안하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하겠느냐고 무언으로 말한다. 새알심이 거들고 나선다. 너도 풀어지고 나도 풀어져 서로 어울려 속 아픈 이들에게 다가가자 한다. 참으로 눈물겹다. 난 언제나 저런 마음이 될까. 나를 돌아보며 돌아선다.
 
이제 동지도 얼마 남지 않았다. 태양은 점점 늦게 뜨고 저녁 어스름은 재빨리 찾아온다. 동지란 이십사절기 가운데 하나다. 일 년 중 태양이 가장 짧은 날이다. 태양이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이날 북반구에서 가장 남쪽에 치우쳐서 뜨고 진다. 남중고도가 가장 낮다. 한마디로 태양이 '바닥을 치는' 날인 셈이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새삼 경탄스럽다. 과학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에 어찌 태양이 바닥을 친다는 것을 알았는지.....
 
태양이 바닥을 쳤다면 반등하는 시기도 있는 법이다. 그 반등 시기가 바로 동짓날 다음날부터다. 음이 사라지고 양이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팥죽에 들어가는 팥은 양으로 친다. 팥으로 팥죽을 쑤어먹는다는 것은 음을 물리치고 양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서서히 봄이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직 봄이 오려면 멀었는데 겨울 한복판에서 봄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고대인들은 태양이 죽음에서 벗어나 부활한다 해서 풍성한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죽었던 태양이 되살아나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였던 셈이다.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 조상들은 동지에 새알심을 자기 나이만큼 먹어야 비로써 진짜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다가오는 새해를 설계하라는 의미로 달력을 만들어 선물했다. 책처럼 만들었기에 책력이라 불리었다. 우리 조상들이 한 해를 마감하고 시작하는 것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했던 셈이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리 반갑지 않은 나이가 됐다. 자연에서 돌아가는 시간은 한결같은데 내 심리적 나이는 가속도가 붙은 지 오래다. 이미 한참 전에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다. 고치려고 하지만 어림도 없다. 시간을 잡아 보려 마사지며 지압이며 애를 써 보지만 내게 남겨진 시간의 흔적은 점점 선명하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피터 팬이 부럽다.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피터 팬이 부럽다 못 해 내가 피터 팬이 되고 싶은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난 피터 팬을 경멸했었다. 제 위치를 망각하고 사는 피터 팬의 삶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피터 팬이 되고 싶은 요즘이다. 마음과 몸이 이쯤에서 그냥 피터 팬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 한 그릇을 사 들고 돌아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