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메모, 그리고 수집

어릴 때부터 일흔 살 넘기까지 길러온 습관 중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고 지녀 온 나를 특징 지어주는 버릇을 들라면 주저하지 않고 메모 그리고 수집벽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수집의 첫 기억은 누구나 경험했을 법한 식물, 곤충 채집이리라.

지금은 자연 보호 차원에서 금지되었지만, 그 때 1950년 대만 해도 으례 초등학교 여름 방학 과제엔 식물 채집, 곤충 채집 과제가 빠진 적이 없었다. 집 주변에서부터 들, 산에까지 가서 나무의 잎을 따고, 풀을 뽑아 정성스레 흙을 털고 신문지나 책갈피 사이에 끼워놓고, 항상 마루 한 켠에 놓여져 있던 다디밋돌 밑에 눌러 놓는 것이었다. 종이를 갈거나 매일 자리를 바꾸어 주어, 말랐으나 바스러지지 않는 잎이나 풀을 얻어, 깨끗한 종이책에 정리하여 제출하였었다. 누님들의 협조를 얻기도 했었는데, 방학 과제물 전시회에서 항상 특선을 했던 기억이 난다.

곤충은 잡기 쉬운 잠자리류, 매미류, 나비류, 또 산에 가서 사슴벌레(충청도에선 ‘찌깨벌레’라 한다)를 잡아다 잔인하게 벽에다 핀으로 꽂아 자연사(?)하기를 바랬다. 중학교에 가서야 주사액으로 질식시킨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때는 으레 곤충은 장남감으로 알고 죽이고 했던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지만 풍뎅이 목을 돌려놓고 바닥에 두면 뱅글뱅글 도는데, ‘앞마당 쓸어라, 뒷마당 쓸어라’ 하고 노래까지 불렀으니 끔찍하기까지 하다.

중학교에선 상표 수집 과제가 나왔다. 누님들이나 이웃집 화장대가 공격 목표(?)가 되었고, 5일 장 장거리도 상표 수집터가 되었다. 자연히 그림이나 글씨를 유심히 살피게 되었고 이 때 도안에 대한 눈을 뜬 것 같기도 하다. 지금도 기억나는 상표 도안으로서는 ‘학원사’의 도안이다. 학원사를 나타내는 영어 스펠 중 ‘h' 자를 무릎 세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내고, 무릎 위에 책을 펼친 도안이었다. 담뱃갑이나 성냥 상표는 따로 무리를 만들어 붙였다.

고등학교 쯤 가서는 좋은 말, 좋은 글을 모으는 것이 취미가 되었다. 감수성이 강한 때라 그 모은 것들을 도안 글씨화하여 공책에 정리해 놓고 옆에 끼고 살았다. ‘사랑’ 이란 낱말에서 ‘ㅅ’과 ‘ㅇ’을 하트로 표현하기도 하고, 글씨 모양을 다양하게 변형시켰다. 한자의 ‘생각 사(思)’ 자도 ‘밭 전(田)’ 을 창문으로 그려놓고, ‘마음 심(心)'을 앉아서 창문을 쳐다보는 사람 형상으로 그리면 로뎅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 못지 않는 형상이 생겨나기도 한다.

이성(異性)에도 많은 관심을 갖는 때인지라, 자연히 그런 글들을 모으기도 하였다. 지금도 생각나는 누구의 글인지도 모르는 대표적인 싯구로는 ‘한낱 마음을 지녀, 나 아닌 너를 몰래 간직했더란다. 이 마음을 사랑이라 불려도 좋다. 아니, 그 보다 더 고운 말이 있었으면 한다.’ 가 있다. 

자연히 일기 쓰기도 좋아 해서 학생 땐 학창일기, 군대에선 병영일기, 아퍼 입원했을 땐 병상일기, 초등교육을 맡아서는 교육일기, 노인시설 봉사하면서 봉사일기, 요사이는 ‘영농일기’를 6년 째 썼다.

초보 농사꾼이 이 ‘영농일기’의 혜택을 톡톡히 보고 있다. 6년 간의 영농 상황을 년도별 칸을 맞추어 월별, 일별 기록을 해 가니, 토표 기록만 보아도 때때에 해야 할 일을 알 수가 있다. 모심기나 추수, 비료, 제초제 주는 시기가 해마다 거의 같아 미리 준비하기가 수월했다. 그래도 날씨나 주변 여건에 따라 변화가 많아 이것만 의지할 순 없으나 큰 도움이 되는 것만은 틀림없다. 지금은 긴글일기는 쓰기가 어려워, 컴퓨터를 이용하여, ‘한줄일기(메모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의 중요한 일, 메모가 필요한 것들이다.

이제, 그 동안 모아놓은 ‘말·글 자료’ 들을 정리하여 책으로 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 자료를 모으는 데엔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신문, 잡지는 물론 여행 가서 기념품 상점의 ‘나뭇잎이나 액자의 글’, 장학 지도 나가 교장실의 액자 속 글, 심지어 선생님들이 좋아라 선정하여 유리판 밑에 두고 보는 글들 등이 채집 대상이었다. 이 모아진 글들을 모아 디스켓에 담거나 책으로 편집하여 여러 사람에게 주니 인기가 상당하였다. 

인터넷이 보급된 후론, 더구나 지금같이 핸드폰, 스마트폰에까지 ‘좋은 글’ 홍수 시대가 되었으니, 오히려 선별이 어려울 지경이다. 고르고 고른 노인에 관한 좋은 글들을 전문화하여 ‘노년본생(老年本生)’ 이란 제목의 책을 발간하여 지인들에게 주었다. ‘노년본생’ 이란 말은, 이제 노년이 여생(餘生-30년 성장, 30년 전업 후 오는 옛 여생)이 아니라, 다시 ‘제이의 본생’ 이 된다는 뜻으로 만든 말이다. 
 
“모시야 적삼 안섶 안에 / 연적같은 저 젖 보소! / 많이 보면 병 납네다. / 담배씨만큼이나 보고 가소!”  

사범학교 때 국어선생님께서 낱말의 쓰임을 이야기하실 때, ‘담배씨’가 쓰여진 글을 예로 들어 들려주신 글이다. 많이 보면 병나니까 작디 작은 씨앗인 담배씨만큼 보란 글이 얼마나 재치있고 재미있는가? 모인 글들이 ‘담배씨’ 란 낱말이 잘 쓰여진 것처럼 소중히 잘 쓰여지길 바래서, 책 서문에 인용하였다. 이것도 그 당시의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