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목소리는 낮다. 낮은 울림 안에는 그가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과 농사에 대한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난 끝에 오른 배낭여행, 그 길 위에서 바라본 자연이 좋아 전라북도로 온 그의 울림 있는 이야기를 들어보자.
배낭여행에서 새로운 길을 찾다
황준원씨는 교육공무원이었다. 직장은 한 대학의 의과대학. 새벽 4시면 일어나 자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 한 번 쓰다듬어 주지 못한 채 출근길에 오르곤 했다. 자신보다 일찍 와 있는 동료들과 학생들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맛볼 수 있는 소소한 기쁨은 송두리째 던진 채 오로지 공부와 연구에만 매달리는 학생들을 보며 숨이 턱 막히기도 했다. 과연 저 삶이 행복한 삶일까. 저 삶이 지속된다면, 훗날 그 삶을 돌아보았을 때 과연 행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꿈꾸던 미래는 뿌연 안개 속에 갇혀있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 느끼던 어느 날. 그는 아내를 잃었다. 아내는 작별인사도 없이 하루아침에 하늘 끝으로 가버렸다. 감당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던 아내와의 갑작스런 이별. 슬픔을 슬픔이라 여기지도 못할 만큼 힘든 이별은 고난일 수밖에 없었다. 새 삶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때, 그는 전국을 걸어 순례하는 배낭여행 길에 올랐다. 그 길에서 만난 모악산 자락은 너무도 푸르렀고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이는 김제의 어느 마을이 그리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고난 끝에서 바라본 산 밑 마을은 마치 자석처럼 그를 끌어당겼고, 언젠가는 이곳으로 돌아오리라 결심한 그는 그 길로 내려가 가계약으로 농지 임대를 맺었다.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다시 일어설 용기가 생겼다. 그는 서서히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해 나갔다. 시골살이에 대한 마음가짐부터 준비되어야 진정한 귀농이 시작되는 것이라 생각해 도시에서의 익숙했던 생활습관부터 버리기로 했다. 밤낮으로 울리던 핸드폰도, 집을 꽉 채우던 세간들도, 하루 종일 시달리던 온갖 일거리도 훌훌 털고, 오로지 자신과 가족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어느 날부터 조금씩 ‘내려놓기’가 가능해졌고, 불필요한 것들보다 오직 ‘내것’인 것만 안은 채 그는 김제시민이 될 수 있었다.
“꼬박 12년이 걸렸지요. 그만큼 도시에서 농촌으로 간다는 것은 제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단과 준비가 필요했지요. 무엇보다 농촌으로 간다는 확고한 의지와 농촌으로 가려고 결심한 저 스스로를 인정해야 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이러다 말겠지,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처음부터 무턱대고 많은 것을 준비하고 잔뜩 기대만 가진 귀농은, 자칫 무늬만 귀농으로 끝난 채 몸과 마음은 도시로 돌아가려 할지도 모릅니다. 저 역시도 그러한 걱정 때문에 일찌감치 도시에서의 생활습관부터 고쳐 나갔지요. 무엇보다 온전히 농촌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던 거죠.“
무연고자가 귀농을 한다는 것
2009년, 오랜 준비 끝에 김제로 온 그에게 귀농은 설렘이었다. 하지만 귀농은 노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준원씨가 귀농한 때만 해도 귀농관련 정보나 교육이 전무했을 뿐더러 김제시민으로 가는 행정절차 역시 알려주는 이가 없었다. 무조건 스스로 찾아나서야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고 세월을 그냥 흘려보낼 수만은 없어 마을에서 농사를 잘 짓는다는 이를 찾아 나섰다. 농사의 ‘농’자도 몰랐으니 무조건 배우자 결심하고, 가장 기초적인 벼농사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마을의 대소사에선 빠지지 않고 궃은 일을 자처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니 그저 이방인으로만 그를 대했던 마을 주민들이 하나 둘 먼저 손을 내밀기 시작했다.
“제가 처음 마을에 들어왔을 때, 주민들은 제가 간암에 걸려 2~3개월안에 죽을 사람인 줄 알았답니다. 교류 없이 마을을 어슬렁거리는 저를 보고 온갖 소문이 돌았지요. 그 사실을 알고난 후에 저는 마을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습니다. 어르신들의 소소한 잡일은 모두 제가 해드렸지요. 나이가 들어 몸이 성하지 못한 어르신들에겐 젊은 일손이 필요했고, 도울 사람은 저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러다보니, 차츰 저를 필요로 하는 주민들이 많아지셨죠.”
마을 주민들이 컴퓨터고 선생이자 멘토라 여기고 열심히 배운 준원씨는 가장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주민들과 가까워지라고 조언한다. 처음부터 마을주민으로서가 아닌 마을이 필요로 하는 일꾼이라는 생각으로 마을에 흡수된다면, 사람도 얻고 농촌의 정서도 쉽게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그렇게 준원씨는 귀농 2년차가 되어서야 독립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들을 멘토로 삼고 모르는 것은 직접 부딪혀가며 지은 첫 농사. 그리고 귀농 5년차인 지금은 밭농사와 하우스를 병행하며 토마토를 주작물로 삼았다. 토마토는 다른 작물에 비해 가격의 등락폭이 적고 1년 내내 소득을 얻을 수 있어 어린 세 자녀를 뒷바라지하는 그에겐 안성맞춤인 작물이었다.
“사실, 토마토농사는 초기자금이 많이 들고 관리하는데도 노하우가 필요합니다. 실질적인 기술멘토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지요. 농사는 토양에 따라서, 기술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획과 마케팅에 대한 차별화된 능력이 있어도 생산력이 없으면 그것은 쓸모없는 농사입니다.”
작물을 정하니 이제야 농사를 짓는다는 게 실감난다는 준원씨의 입가엔 함박웃음이 핀다. 그의 용기와 의지만큼 그가 짓는 토마토농사도 사람농사도 모두 풍년이리라.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지 마세요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귀농하면 행복합니까?”
질문을 받을 때마다 준원씨는 답한다. “당신의 행복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제게 얼마나 행복하냐고 묻지 마세요. 저는 농촌에 와서 농사를 짓는 일이 좋을 뿐입니다. 이 질문을 하기 전에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부터 바꾸고 다시 질문해 주세요. 귀농자체는 육체적, 정신적 노동이 같이 수반됩니다. 그것들을 감내할 수 있을 때. 저를 다시 찾아와 주세요. 농촌을 이해하지 않으면 귀농은 100% 실패합니다.”
무엇보다 귀농을 하려면 의식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하는 황준원씨에겐 도시보다 더 치열한 곳이 농촌이었다. 자신이 농촌에 내려오기까지도 12년이나 걸렸듯 쉽게 결정해서도 안 되는 곳이 농촌이고, 성과보다 과정이 중요한 곳이 농촌이며, 혼자가 아닌 더불어 사는 곳이 농촌이기 때문이다.
농촌은 분명 도시와는 다르기 때문에 세밀한 교육과 준비가 필요하다. 지역을 알고 지역의 자연환경을 파악한 뒤 지역에 맞는 작물을 공부하고나면 그제서야 농촌이란 곳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토착민과 귀농인과의 관계정립도 차근히 될 것이다.
황준원씨는 귀농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
첫째, 지원금을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지원금은 결국 빚이다. 농촌에 오기 전까지 전라북도가 아닌 타지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왔다고 지원부터 받는 것은 원주민들에겐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 걱정부터 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것. 걱정이 앞서면 농촌에 내려올 필요 없이 그저 도시에서 농촌을 열망하는 수밖에 없다. 직접 와서 부딪쳐보고 경험하는 것이 진짜 농촌살이고 귀농이다. 셋째, 일단 마을에 들어왔으면, 마을의 일꾼이 된다고 생각한 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귀농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이방인으로 인식되는 지름길이다. 귀농인이라는 전제를 일찌감치 버리고, 귀찮은 일이라도 원주민들보다 먼저 움직이며 마을의 대소사에는 함께 참여해야 천천히 마을에 흡수될 수 있다. 주민들에게도 귀농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넷째, 농촌에 와 집부터 구하려 하지 말고, 예비귀농인을 위한 ‘귀농인의 집’등에서 먼저 생활해 보라는 것이다. 농촌의 정서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 제대로 고민하고 행할 수 있을 때에야 진짜 귀농인이 되는 것이라 말하는 준원씨는 앞으로도 동고동락하는 귀농인들과 협동조합을 꾸려 판로를 개척할 계획이다. 또 귀농인농가를 연계한 체험프로그램을 연구해 우리 농산물에 대한 홍보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설 예정이다.
준원씨에겐 아직 꿈이 많다. 귀농귀촌인들의 역량을 살릴 수 있는 공간 구축과 더불어 불우아동들과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싶단다. 휘황찬란하진 않지만 단단하고, 거대하지만 소박한 그의 꿈은 어둠속에 갇혀있는 이들에게 희망이라는 빛이 되어줄 듯 하다. 어서 그 빛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비추길 기대해 본다.
자료제공·전라북도 귀농귀촌 지원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