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머릿속이 황량하다. 희고 북실북실한 털 뭉치를 떠올린다. 뒤뚱대는 푸짐한 엉덩이와 허스키한 비브라토(vibrato·목소리 떨림) 너머로 온화한 목장의 정경이 펼쳐진다. 마음이 편해진다. 을미년 새해, 상쾌한 한 해 시작을 위해 양 보러 가는 발걸음이 많아지겠다. 앞뒤 안 보고 강원도 대관령만 떠올릴 양이면 섭섭하다. 춥다. 남쪽을 보자. 십이지신마다 방위를 지니는데, 마침 양띠는 남남서(南南西). 거기 파릇파릇 풀 돋는 들판이 있다. 풀 뜯는 양들이 있다. 음매, 자꾸 부른다.
◇양 보러 옵서양~, 제주 양떼목장
말(馬) 아니다. 양(羊)이다. 제주도에 웬 양떼목장이냐, 뜬금없을 수 있다. 제주도민 중에도 이곳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 제주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로 20분 정도 달리면 제주시 애월읍 양떼목장에 닿는다. 여덟 채의 삼각지붕 통나무 펜션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4만2975㎡(1만3000평)의 방목지가 펼쳐진다. 목책 안에서 두세 살 된 열두 마리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히어(here)!" 이곳 장동현 대표가 외치자 보더콜리 종(種) 양몰이개 베키(5)가 잽싸게 뛰어온다. 컴바이(Come by·좌로 돌아), 어웨이(Away·우로 돌아), 라이다운(Lie down·포복) 등 명령어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양몰이를 한다. 말 안 들으면 가차없이 이빨로 털을 물어뜯는다. 장씨가 곁으로 다가오는 양들을 어루만지며 "개가 무서우니까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 목장엔 총 스물네 마리가 있는데, 제주 양이지만 핏줄은 강원도에 있다. 대관령에서 분양받은 메리노 종이다. 날 풀리는 봄(4월)부터는 오전·오후 한 번씩 관광객들을 위한 양몰이 공연과 털깎기 구경도 가능하다. 그때쯤엔 새끼 4마리가 더 늘어 있을 것이다.
순한 양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본인을 양으로 알고 있는 미니돼지 누비(3)가 연신 양에게 침을 묻히며 대시해도 특유의 시크한 눈으로 나지막이 음매, 읊조릴 따름이다. 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건 먹이뿐. 양은 풀을 먹을 때 혀 대신 입술을 사용하니 건초는 짧아야 좋다. 건초보다 사료에 즉각 반응하는데, 눈이 털에 덮인 데다가 눈동자에 별 초점이 없어 무심한 듯 보여도 사료통을 흔들면 불 같은 열정을 뿜어낸다. 숙박객이 아니어도 7000원만 내면 건초(알팔파·Alfalfa)나 말 사료를 주며 양과 놀 수 있다. 순둥이라고 약 올리면 재미없다. 먹이를 줄듯 말듯 계속 장난만 치면 양치기 소년 취급한다.
현무암 같은 똥덩이를 피해 걸으며 방목장을 누비는 사이 해가 진다. 통나무 펜션은 약 33㎡(10평)의 2층 집. 몸을 녹였다가 밤에 잔디정원으로 나와 간단히 공놀이를 하거나 캠프파이어와 바비큐 파티를 할 수도 있다. 주인장이 직접 만든 나무 그네도 매달려 있다. 흔들흔들, 풍경이 바람결처럼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