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14 14:44

지난 9일 해 질 무렵의 제주 양떼목장 전경. 포동포동한 양들이 방목장을 거닐고 있다. 뒤편으로 통나무 펜션이 늘어서 있다. 본인을 양으로 착각하는 미니돼지 한 마리도 섞여 있으니 찾아보시길.
지난 9일 해 질 무렵의 제주 양떼목장 전경. 포동포동한 양들이 방목장을 거닐고 있다. 뒤편으로 통나무 펜션이 늘어서 있다. 본인을 양으로 착각하는 미니돼지 한 마리도 섞여 있으니 찾아보시길.

피곤한데 잠이 안 온다. 머릿속이 황량하다. 희고 북실북실한 털 뭉치를 떠올린다. 뒤뚱대는 푸짐한 엉덩이와 허스키한 비브라토(vibrato·목소리 떨림) 너머로 온화한 목장의 정경이 펼쳐진다. 마음이 편해진다. 을미년 새해, 상쾌한 한 해 시작을 위해 양 보러 가는 발걸음이 많아지겠다. 앞뒤 안 보고 강원도 대관령만 떠올릴 양이면 섭섭하다. 춥다. 남쪽을 보자. 십이지신마다 방위를 지니는데, 마침 양띠는 남남서(南南西). 거기 파릇파릇 풀 돋는 들판이 있다. 풀 뜯는 양들이 있다. 음매, 자꾸 부른다.

양 보러 옵서양~, 제주 양떼목장

말(馬) 아니다. 양(羊)이다. 제주도에 웬 양떼목장이냐, 뜬금없을 수 있다. 제주도민 중에도 이곳의 존재를 모르는 이들이 부지기수. 제주공항에 도착해 렌터카로 20분 정도 달리면 제주시 애월읍 양떼목장에 닿는다. 여덟 채의 삼각지붕 통나무 펜션이 늘어서 있고, 그 뒤로 4만2975㎡(1만3000평)의 방목지가 펼쳐진다. 목책 안에서 두세 살 된 열두 마리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다.

"히어(here)!" 이곳 장동현 대표가 외치자 보더콜리 종(種) 양몰이개 베키(5)가 잽싸게 뛰어온다. 컴바이(Come by·좌로 돌아), 어웨이(Away·우로 돌아), 라이다운(Lie down·포복) 등 명령어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양몰이를 한다. 말 안 들으면 가차없이 이빨로 털을 물어뜯는다. 장씨가 곁으로 다가오는 양들을 어루만지며 "개가 무서우니까 사람에게 도와달라고 오는 것"이라고 한다. 목장엔 총 스물네 마리가 있는데, 제주 양이지만 핏줄은 강원도에 있다. 대관령에서 분양받은 메리노 종이다. 날 풀리는 봄(4월)부터는 오전·오후 한 번씩 관광객들을 위한 양몰이 공연과 털깎기 구경도 가능하다. 그때쯤엔 새끼 4마리가 더 늘어 있을 것이다.

순한 양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본인을 양으로 알고 있는 미니돼지 누비(3)가 연신 양에게 침을 묻히며 대시해도 특유의 시크한 눈으로 나지막이 음매, 읊조릴 따름이다. 이들을 유혹할 수 있는 건 먹이뿐. 양은 풀을 먹을 때 혀 대신 입술을 사용하니 건초는 짧아야 좋다. 건초보다 사료에 즉각 반응하는데, 눈이 털에 덮인 데다가 눈동자에 별 초점이 없어 무심한 듯 보여도 사료통을 흔들면 불 같은 열정을 뿜어낸다. 숙박객이 아니어도 7000원만 내면 건초(알팔파·Alfalfa)나 말 사료를 주며 양과 놀 수 있다. 순둥이라고 약 올리면 재미없다. 먹이를 줄듯 말듯 계속 장난만 치면 양치기 소년 취급한다.

현무암 같은 똥덩이를 피해 걸으며 방목장을 누비는 사이 해가 진다. 통나무 펜션은 약 33㎡(10평)의 2층 집. 몸을 녹였다가 밤에 잔디정원으로 나와 간단히 공놀이를 하거나 캠프파이어와 바비큐 파티를 할 수도 있다. 주인장이 직접 만든 나무 그네도 매달려 있다. 흔들흔들, 풍경이 바람결처럼 지나간다.

① 미니돼지 누비(3)가 양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 ② 양 구경 후 제주시 ‘양’에서 구워 먹는 양 생고기.
① 미니돼지 누비(3)가 양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다. ② 양 구경 후 제주시 ‘양’에서 구워 먹는 양 생고기.
양들과 한참을 놀았더니 출출하다. 차를 공항 근처로 몰아 제주시 노형동으로 간다. 2008년 처음 문을 연 양고기 전문점 '양(羊)'. 킬링이 힐링을 꽃피우는 참혹한 아이러니라니. 이곳 손님 대부분이 메뉴판도 안 보고 생갈비를 주문한다. 호주에서 급랭한 램(lamb·생후 12개월 미만의 양) 고기를 비행기로 들여와 숙성 과정을 거쳐 특유의 노린내도 없고, 텃밭에서 직접 기른다는 상추와 깻잎 등 찬도 정갈하다. 볶은 양배추와 함께 싸서 먹으라고 밀전병도 같이 나온다. 양고기엔 CLA라는 항암물질이 들어 있는데, 암세포의 분열을 막아준다고 한다. 소·돼지에 비해 칼슘도 10배 정도 많다. 사자성어 양두구육(羊頭狗肉)이 생겨난 이유가 있는 것.

배도 부르니 좀 쉬어야겠다. 혼자 왔거나 2명 단위라면 서귀포에 2013년 오픈한 '제주스테이 비우다'가 어울린다. 지난해 한국건축문화대상 일반주거부문 대상 등을 받은, 건물만으로 볼거리가 되는 숙소다. 해발 148m에 있어, 2층 객실에선 창문 밖으로 마라도·가파도가 내다보인다. 모든 방은 온돌 바닥. 침대가 없다. TV도 없고, 취사 시설도 없다. 대신 1층에 카페 '채우다'가 있다. 2월쯤엔 카페 내에 싱글몰트 바를 설치해 조용히 술 한잔 할 수도 있다. NASA(미항공우주국)에서 개발했다는 템퍼 페딕(Tempur Pedic) 매트가 깔려 있다. 잘 때 무중력 상태를 유지해 허리 부담을 최소화한다고 한다. 정숙을 위해 13세 미만은 아예 투숙이 불가하다. 이름처럼 마음을 차분히 비울 수 있는 곳이다. 잠 안 올 일은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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