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못 내려놔"

이웃 일본에서 노년층 사이에 조용히 확산 중인 게 하나 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엔딩노트(ending note)’다. 고령에 혼수상태가 되거나 세상을 떴을 때를 대비해 미리 마련해 놓는 문서다. 여기에는 가족에게 남기는 말이나 주치의와 가족의 연락처, 장례 절차 등을 적어 넣는다고 한다. ‘탈무드’에서는 ‘매일을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지만, 매일은커녕 엔딩노트와 같은 한 생애의 마무리 준비마저 우리에겐 아직 낯선 일인 것 같다. 어쩌면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대한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마지막을 미리 준비해 놓는 것도 어쩌면 다 온전한 삶을 바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매일을 마지막 날’은 아니더라도 ‘매년을 마지막 해’로 연습해 나가다 보면 온전한 삶의 마무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한 해를 떠나보내고 새해를 맞이한 이제, 새삼 이웃 나라의 엔딩노트를 내 앞에 가져다 놓아보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리고 ‘매일을 당신의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라’에는 곧바로 ‘매일을 당신의 첫 번째 날이라고 생각하라’가 이어지고 있듯, 엔딩노트는 새해를 시작하는 ‘비기닝노트(beginning note)’ 또한 되는 까닭이다. ‘A good beginning makes a good ending.’, 시작이 좋으면 끝이 좋다는 말도 있고 보면 좋은 마무리가 곧 좋은 시작이요, 좋은 시작은 다시 좋은 마무리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연말연시의 다소 들떴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나만의 엔딩노트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꿀꺽 삼킨 다이아반지'

매년 쓰는 엔딩노트는 반성하고 노력하며 통제할 수 있는 내용을 적는다는 점에서 생의 마지막 엔딩노트와는 다르게 된다. 나의 첫 번 엔딩노트에는 ‘내려놓기’만을 쓰게 될 것 같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내려놓아야지' 진작 다짐해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음으로만이 아니라 글로 써놓으면 보다 실천이 잘 된다는데 힘입고 싶어서 내려놓을 것들을 조곤조곤 꼽아볼까 한다. 최근 들어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교통사고며 암 진단을 받은 주변인들과 나 또한 전에 없이 병원을 들락거리면서 정말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절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 내려놓지 않으면 졸지에 앗아감을 당한 듯 느낄 날이 들이닥칠지 누가 알겠는가. 더 최악의 경우는 죽을 때까지 재물이거나 틀어진 마음을 껴안은 채 세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속해 있는 독서회의 한 회원에게서 바로 그런 경우를 들었다. 몇 다리 건너 아는 댁의 어르신이 임종을 앞두고 느닷없이 1천만 원짜리 수표 2장을 은행에서 찾아오라고 하시더란다. 어쩌시려나, 나눠주고 가시려나 하며 찾아다 드리니 당신의 양쪽 겨드랑이에 끼워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운명하셨다고 한다.

옆에서 듣던 다른 회원이 20여 년 전 어느 일간지의 ‘휴지통’이란 난에 실렸던 한 할머니의 경우가 잊히지 않는다며 이야기를 거들었다. 임종 전 할머니는 다이아반지를 원하셨다. 돌아가신 후 다시 팔아도 되니까, 하면서 자식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반지를 마련해 드렸다. 반지를 받은 할머니는 손가락에 끼지 않았다. 대신 입에 넣더니 그만 꿀꺽 삼키고는 이내 세상을 떴다고 한다. 죽을 때는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재물에도 이렇듯 “못 내려놔”가 있을진대, 마음의 “못 내려놔”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미워하는 힘으로, 결코 용서 못하는 한으로 그냥 살아가는 이들이 의외로 많으니 말이다.

  
'소 풀어주기’

이미 수다한 현인들이 물심양면으로 다 내려놓으라고, 다 비우라고 설파해왔다. 그 가운데 최근 읽은 틱낫한 스님의 저서 <화해>의 한 대목에서 나의 엔딩노트에 적어 나갈 지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소 풀어주기’다. <어느 날 부처님이 많은 제자들과 함께 숲 속에 앉아 있는데, 농부 한 사람이 지나갔다. 농부는 방금 소를 잃어버렸다면서, 소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농부에게 말했다. "아니오. 우린 당신의 소가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소. 다른 방향으로 갔나 봅니다."

농부가 가고 난 후 부처님은 제자들을 바라보고 말했다. ‘그대들은 잃어버릴 소가 없으니 행복하지 않은가.’ 종이 한 장을 가져다 놓고 우리가 가진 소의 이름을 다 적어 보자. 그런 다음 깊이 바라보며 우리가 그 소들을 풀어줄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해 보자. 우리는 아마 그 소들이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이 바라본다면, 이런 것들이 오히려 참된 기쁨과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얼마 전 집 근처에 할인마트가 새로 생겼다. 단골 대형마트가 폐점하는 바람에 집 앞 슈퍼에서 다소 비싼 장을 보아오던 참이라 잘 됐다 싶었다. 게다가 새 마트에선 개점 할인행사가 대대적이었다. 얼마 이상 구입하면 선물도 준다기에 생식품은 물론이고, 당장 필요 없는 공산품까지 구입했다. 조금만 살 것처럼 가져갔던 장바구니가 터져나갈 듯 부풀었다. 손가락이 부러져라 들고 오는 길에 문득 반성이 솟구쳤다. 내려놓기 한다더니 이 무슨 ‘역기 들어올리기’ 수준이란 말인가. 나 같은 사람은 엔딩노트를 매년이 아니라 매일 써도 부족할 판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