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1.28 10:18

Memories

매년 차곡차곡 쌓이는 것은 나이만이 아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더욱 깊어지는 특별한 기억들. 그리움과 설렘이 서린 보석 같은 시간 속으로 떠나는 시니어들의 설날 추억여행에 함께해보자.


평등한 세상을 여는 윷놀이

벌째 15년째 이어오고 있는, 아내가 넷째로 있는, 오자매계. 설날이면 가끔 ‘윷놀이 오자매 월드컵’이 열린다. 그날은 한 팀에 몇 명씩 팀을 짜 총 4팀이 맞붙은 윷판이었다. 상품은 노래방 2시간 이용권! 마지막 판 4개 말을 묶어 앞서던 우리 팀은 이제 2칸만 남겨둔 상황이었다. “개도 걸도 말고 도만 나와라!” 뒤를 추격해오던 윗동서의 목소리가 벼락 치듯 울렸다. 이제 갓 초등학생이 된 조카손녀 차례. 윷가락 네 개를 간신히 쥔 고사리 두 손이 엄청나게 커 보였다. “도, 나와라!” 세상 모두 내 것인 양 앙감질에 윷가락 두 팔이 하늘 높이 공중제비를 한다. “하하하, 도다!” 조카손녀는 천장까지 머리카락을 날리며 춤을 춘다. “어이구, 어쩔꼬, 하필 도라니! 이젠 꼴찌다.” 실컷 웃다 보니 친척들 얼굴이 서로 닮아가는 듯했다. 또 어느새 마음 구석구석 세상사에 찌든 때를 서로 닦아주고 있었다. 삼국시대 이전,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윷놀이. 이제 우리 설 놀이 문화로 자리 잡았는데, 오랜만에 만난 친척끼리 둘러앉아 함께 즐기던 추억을 서로 어루만져주며 ‘화합의 장’을 만든다. 또한, 남녀노소 개인 능력보다 공평한 확률의 윷놀이는 아이들에게 ‘어른과 대등한 놀이’를 하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노력한 만큼 대가를 얻을 수 있다는 원칙으로 아이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주는 윷놀이! 올 설날도 평등한 세상을 여는 윷놀이 몇 판으로 신나게 놀아볼 예정이다. 김봉길(<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아버지의 소원

영화 〈국제시장〉을 보던 중 몇몇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영화 속 아이들처럼 나 역시 미군 지프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곤 했었다. 그 시절 우리에게 설날은 추석, 그리고 소풍 가는 날과 함께 잠 못 이루고 기다리는 명절 중의 명절이었다. 설날이 되면 떡과 이북식 만두를 같이 넣어 끓인 떡만둣국으로 제사를 지내고, 부모님 그리고 이웃집 어른들께도 세배를 했다. 아버님이 홀로 월남하셔서 친척이 없어 가까운 외할아버지, 고모, 할아버지 댁에 갔다 오면 세배는 한나절을 넘지 않고 끝났다. 날씨가 조금 풀린 오후에는 며칠 전 만들어놓은 꼬리를 길게 늘인 가오리연을 가지고 바람이 부는 언덕으로 달려가 일찌감치 푸른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많은 연 사이로 내 연을 날리며 소원을 빌었다.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소원이지만 무슨 특별한 소원이 있었겠는가. 그저 명절같이 배불리 먹으면 좋은 시절이었다. 저녁이 되면 아버님은 술 한 잔 걸치시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형제들 말씀을 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아버님은 돌아가셨다. 그리고 몇 해 뒤. 관광으로나마 북한을 찾아 금강산 만물상 근처에 그동안 보관해둔 아버님의 머리카락 몇 개를 북녘 땅에 뿌려드렸다. 생전에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마음이 조금은 풀리시길 바라며…. 정은조(〈시니어조선〉 명예기자)


그 나무 아래서 아버지를 만나다

선산이 있는 고향 마을의 이름은 비상리(飛上里), 이름에 걸맞게 지금은 공항 활주로가 들어서 있다. 비행기 날아오르는 그 길을 내 어린 시절엔 설 성묘를 나선 아버지의 뒤를 따라 두 손을 비벼 귀를 덥히며 걸었다. 선산으로 들어서기 전 언덕 위에는 오래된 나무 한 그루와 허름한 묘 하나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한 동안 바라보시곤 했다. 어린 시절엔 연유를 물어도 들은 척도 않던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이 되던 설 성묘 때 드디어 입을 여셨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학문과 글솜씨가 뛰어났던 분의 묘라고 한다. 그러나 오래전 퇴락해버린 집안에서 그것도 서자로 태어났으니 그의 재주는 때를 얻지 못했다. 결국 시대와 운명을 한탄한 그는 선산 어귀 언덕에서 나무에 목을 맨 뒤 그 밑에 묻혔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에 소름이 돋았고 시대와 인간의 운명에 대해 사춘기 고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후 중풍으로 쓰러져 몇 년간 자리 보전을 하셨고 다시 그 길을 함께 걷지 못하셨다. 아버지가 내게 대학에 간들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으니 고향에 남아 어디든 장학생으로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을 때 단호히 고개를 저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날의 각성이 한몫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문중과 이웃에서 아버지를 추모하는 비를 세웠다. 긴 추모의 글 중 잊히지 않는 대목은 소설개로(消雪開路)로 시작되는 아버지 코흘리개 시절 이야기이다. 글을 배우려는 열정을 누르지 못해 겨울눈이 쌓이면 눈을 치워 길을 내며 먼 길을 걸어 서당을 빠지지 않았고 결국 문리를 깨우쳐 훗날 서당을 열기도 했다는 대목이다. 어쩌면 아버지도 그 나무 아래 무덤 앞에서 전율했던 어느 날이 있으셨던 걸까? 변상욱(CBS 본부장)


북어 껍질만두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부모님 그리고 우리 사남매까지 삼대가 모여 살았다. 설 명절이 되면 엄마는 여고 졸업 후 양재학원에 다니시며 쌓은 실력으로 한복을 새로 지어주시곤 했다. 엄마 치마를 줄인다든가 하는 식으로 집에 있던 천을 재활용해 만든 한복인데도, 엄마의 손을 거치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새 옷이 됐다. 빨간색과 분홍색의 중간쯤 되는 고운 빛깔의 치마와 색동저고리는 지금도 눈에 선할 정도로 어린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설날 아침, 집에서 차례를 지낸 뒤 걸어서 한 시간 반이나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증조할아버지의 과수원집으로 세배를 가곤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머슴 아저씨의 지게를 타고 편히 다닐 수 있었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는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 길을 걸어가야만 했다. 그렇게 힘들게 세배를 다녀오면 할머니는 할아버지 상에 ‘북어 껍질만두’를 만들어 탕으로 끓여 내셨다. 북어 보푸라기부침을 하고 남은 껍질을 재단해 만두소를 넣어 밀가루를 묻힌 후, 다시 달걀 물에 적셔 지져낸 것을 북어 껍질만두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맑은 양지머리 육수를 부어 끓여내면 할아버지 친구분들 약주 상머리에서 늘 환영받던 메뉴인 ‘북어 껍질만두탕’이 완성됐다. 매년 설 명절이 다가오면 오며 가며 집어 먹던 북어 껍질만두, 그리고 양지머리 육수나 북어머리 육수로 맛을 냈던 북어 껍질만두탕의 시원한 국물 맛이 그리워진다. 박종숙(요리연구가)


고사리손으로 고쳐 입던 설빔

그 시절에는 1년 내내 제사와 명절이 부지런히도 찾아오곤 했다. 친정어머니도 평생 제사를 치르셨고 집안 여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명절 전날이면 여자들은 하루 종일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했다. 어머니는 솥단지를 엎어놓고 수수부꾸미를 부쳤고 한쪽에서는 언니와 내가 맷돌을 돌리며 조청을 고아 엿을 만들었다. 설에 입을 옷을 준비하는 일은 음식 준비보다 훨씬 시간이 많이 걸렸다.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는 보통 보름 전부터 옷장 속에 고이 넣어두었던 한복을 꺼내 손질을 시작하셨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의 옷은 손길이 더 많이 갔다. 보통 아이들 한복은 처음부터 시접을 넉넉하게 넣어서 지었다. 그러고는 키가 자랄 때마다 옷을 뜯어서 조금씩 소매나 바짓단을 늘려 고쳐 입었다. 명절을 일주일쯤 남겨둔 무렵에는 집집마다 깃이나 동정을 새로 달고, 버선과 양말을 깁느라 바느질이 한창이었다. 깃을 만들 때는 화로를 가져다 놓고 인두로 지지거나 숯다리미로 다리기도 했다. 그때는 어린 여자아이들도 자기가 입을 옷은 직접 바느질하는 게 흔한 풍경이었다. 기껏해야 초등학생인데 제법 솜씨가 좋은 아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열 살 무렵부터 웬만한 어른 못지않게 바느질을 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준비한 설빔을 설 아침에 8남매에게 입혀주셨다. 언니랑 내게는 색동저고리를 입히고 타래버선을 신기고 머리에는 조바위를 씌워 동네 어른들께 세배를 보냈다. 그렇게 어머니를 따라 바지런히 바느질을 했기 때문일까. 세월이 흘러 옷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고 지금도 특별한 날을 앞둔 이들을 위해 한복을 짓고 있다. 요즘은 평상복으로 한복을 입는 사람들이 많지 않지만, 좋은 날에는 고운 우리 옷으로 멋을 내는 풍습이 오래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본다. 유홍숙(한복 명인)


취떡

벨이 울린다. 택배가 도착했나 보다. 설날에 먹으려고 어렵게 수소문해서 찾아내 주문한 취떡이 왔다. 택배 상자를 뜯으니 삽십 센티 길이로 차곡차곡 쌓인 취떡에서 고향 향기가 물씬 풍긴다. 군데군데 밥알이 툭툭 튀어나온 것이 영락없는 고향 취떡이다. 겨울이라 굳어진 떡을 얼른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노릇노릇하게 구워본다. 바람 주머니가 봉긋 솟아오른다. 어릴 때처럼 손가락으로 바람 주머니를 툭툭 터트려본다. 수리취 향이 방 안 가득 퍼진다. 내 고향 강릉에서는 설날이면 취떡을 해 먹었다. 음식이 귀한 시절 어머니는 마음먹고 한 말이나 두 말쯤 취떡을 만드셨다. 찹쌀로 절편처럼 만들어 어른 손바닥보다 길게 잘랐다. 별다른 고물은 묻히지 않고 절편처럼 만들었지만 어떤 문양도 찍히지 않아 투박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 떡은 겨우내 우리에겐 맛있는 별식이자 간식이었다. 유년 시절 방 안에는 늘 화로가 있었다. 그 화로에 석쇠를 걸치고 굳어진 취떡을 올려놓았다. 취떡이 화롯불 위에서 구워질 때면 볼록볼록 바람 주머니가 만들어지고 고소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져나갔다. 굳이 부르지 않아도 고소한 냄새에 이끌려 오남매가 화롯가에 모여들었다. 취떡 하나씩 들고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뜨거운 취떡을 옮겨가며 호호 불며 먹었던 그 고소한 맛을 난 아직 잊지 못한다. 그 시절의 그 풍경은 아름답고 행복한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조규옥(<시니어조선> 명예기자)


설맞이 목욕

설날이 다가오면 식구마다 행사 치르듯 공중목욕탕에 가서 해묵은 때를 벗겨내고 와야했다. 밀려드는 목욕객들로 준비된 옷장은 턱없이 모자라고 바닥에 던져놓은 바구니마다 벗어놓은 껍데기들이 수북한 풍경. 자리 잡을 곳 없어 보이는 탕 안으로 아버지는 내 손을 끌고 들어가 어찌어찌 한쪽에 자리 잡고 “어~ 시원타!”를 연발하며 못 미더워하는 내 손을 잡아당긴다. 또 속았다는 것을 알지만 잠시라도 탕에 있어야 나올 수 있었는데, 탕에서 나오는 즉시 아버지 손에 장갑처럼 끼워진 때수건에 내 몸 전체를 내맡겨야 했다. 구석구석 밀고 오라는 어머니 특명에 아버지는 내 몸을 힘주어 밀면서 “이거 봐라~ 이때 봐라~” 하시며 오늘의 성과를 확인시키려 하셨다. 그렇게 한바탕 전쟁을 치르고 집에 오면 어머니는 당시 ‘고리땡’이라고 부르던 코르덴 바지와 나일론 점퍼, 그리고 양말 몇 족을 설빔이라며 내어주셨다. 우리가 그때 어머니, 아버지 나이가 되고 보니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고,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그분들 자리가 너무 커 보인다. 사람이 먼 훗날을 생각하면 젊은 것이고, 지난 과거를 자꾸 되뇌면 늙은 것이라는데 설날이라는 단어를 앞에 놓고 보니 뭉게뭉게 옛 기억만 피어오르는 걸 보니 이제 나도 늙었나 보다. 김신묵(<시니어조선> 명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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