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나도 패셔니스타!

 “나 어때요?” 셋이 저녁을 즐기던 레스토랑의 의자를 밀치고 선배가 일어났다. 조카의 결혼식에 다녀오는 길이라더니 선배는 빨간색 재킷에 검은 스커트와 모자, 빨간색의 작은 핸드백으로 멋을 냈다. 어두운 색의 펑퍼짐한 옷에 큰 가방을 메고 나타나던 평소의 선배가 아니어서 내 눈이 동그래져 바라보고 있던 참이었다.

“오늘 아주 좋아 보여요. 앞으로도 이렇게 색 좀 쓰세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일어섰던 선배는 주위를 신경 쓸 것도 없이 테이블 옆에서 빙그르르 돌아 보이기까지 했다. 일흔이 내일모레고, 손자들도 여럿 둔 할머니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렇게 하고 행사에 가도 되겠어요?” 물어는 보지만 며칠 후 큰 상을 받는다는 자리에 입고 갈 옷을 선배는 이미 결정한 듯했다.

뭘 입나? 설과 같은 명절의 나들이에는 물론이고, 크든 작든 모임에 나가려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고민이다. 슬슬 계절이 바뀌려 하면 그렇고, 나이가 들어가면 더욱 그렇다. 평소처럼 내가 편하고 좋아하는 옷이면 그만이 아니다. 자칫 구닥다리 늙은이로 보이지 않을까, 남들에게 보이는 나를 고려해야 하는 까닭이다. 더구나 늘 보는 것도 아닌 사람들에게 멋진 모습으로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고, 어떤 경우엔 오해마저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친하게 지내는 교수 한 분이 그런 오해에 시달렸다는 얘기를 들려줬다. 오랜 미국 생활 끝에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참석했는데, 나중에 자신이 망해서 왔다는 소문을 들었노라고 했다. 오래 즐겨 입던 스웨터를 입고 나갔던 게 화근이었다. 하도 입었던 것이라 군데군데 얼룩과 헤진 데도 있었나 보다. 그분은 자신만의 미국식 편의주의적 차림이었음을 알아채고, 이후부터 넥타이는 물론 와이셔츠 소맷부리까지 커프스버튼으로 채우는 멋을 낸단다.

무난하게 아니면 튀게?

하기야 스티브 잡스와 같은 아우라가 있다면 공식 석상에서 검은색 터틀넥을 입은 들 어쩌랴. 오히려 그만의 독특한 멋으로 여겨졌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처럼 대중의 관심을 먹고 자라는 이들은 때때로 무례하다 싶게 격식을 깨뜨린 차림새로 나타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한다. 계산된 고도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특히 연간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만남이나 행사에 가려면 차림새가 부쩍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어쩌면 설렘과 기대가 동반되는 즐거움일 수 있건만, 옷장은 터져나갈 듯한데 ‘입을만한 게 하나도 없다’면 옷을 새로 사나 마냐로 지갑 형편까지 살펴야 한다.

옷을 고를 때도 무난하게, 아니면 좀 튀게 입을까 갈등이 일어난다. 색상부터가 남자들은 말할 것 없지만, 여자들 역시 직장생활과 나이에 따라 화사한 색 보다는 편안한 무채색을 선호하기 일쑤다. 옷매무새 또한 나잇살로 흐트러지는 몸매에 요즘 유행하는 레깅스나 스키니진처럼 딱 달라붙는 건 엄두를 내기 어렵다. 신사복마저 날씬한 실루엣이 강조되는 추세지만, 지금 60대 이상의 많은 이들은 그저 오래 입으라고 사준 한 치수 큰 옷이거나 물려받은 헐렁한 옷을 입고 자라온 세대 아니던가.

디자이너들은 뱃살이 걸리더라도 레깅스나 스키니진을 시도해보라고 권한다. 겹쳐 입으면 오히려 날씬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칙칙해 뵈기에 십상인 어두운색은 피하고 화사한 파스텔톤을 입으라고도 한다. 검정이나 군청색 겉옷보다는 아이보리나 베이지색이 우아해 보이며, 허리를 묶는 S라인 대신 일자형의 H라인과 엉덩이 부분이 풍성한 A라인이 섞인 형태가 바람직하다고 조언한다.

이미 그 같은 차림새로 앞서 선배처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이른바 ‘꽃중년’이나 ‘꽃할배’ ‘꽃할매’들이 속속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버’니 ‘노년’이란 단어를 거부하며 젊게 살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한 백화점이 분석한 6075세대 고객의 구매 패턴을 봐도 소비력이 있는 상위 20%는 40대가 좋아하는 제품군과 브랜드를 집중적으로 쇼핑하는 걸로 나타났다고 한다. 하지만 나머지 6075 고객의 쇼핑 나이는 주민등록 연령과 비슷했다.

생명력 넘치는 자기표현

그래서일까. 나이 든 분들의 모습이 대부분 엇비슷해 뵈니 말이다. 머리 모양만 해도 여자는 ‘뽀글이’ 파마, 남자는 ‘도리 구찌’라 불리는 헌팅캡 일색이다. 주위 여러 사람이 입었다 하면 내게 어울리는지 헤아려보기 전에 입고, 스카프는 하나같이 목에 한번 둘러 턱밑으로 잡아맨 모습들이다. 굳이 새로 사 입지 않아도 가진 옷과 소품들로 멋 내지 않은 듯 멋스러워지는 자신만의 표현법을 궁리하고, 배울 수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무엇보다 먼저 멋에 대한 관심과 시도가 중요할 터이다.

뉴욕 거리의 할머니 패셔니스타들을 카메라에 담은 사진집 ‘어드밴스드 스타일’을 펴내 유명 인사가 된 코헨이라는 패션 블로거는 국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진에 담은 이들은 재활용품 판매점이나 저렴한 빈티지숍에서 옷을 산다. 패션은 창조적인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지나치게 유행을 좇는 것은 좋지 않지만, 잘 차려입고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건 하나의 힐링이 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패션이 아니라 개인의 스타일, 생명력 넘치는 자기표현이다.”

어쨌든 앞으로 얼추 10년이 지나면 인구의 5분의 1이 65세 이상이라니 실버패션시장은 날로 커질 듯하다. 연령대별 백화점 구매 고객 수가 2008년과 비교해 2030세대는 2012년 33% 늘었지만 6075세대는 84%나 늘어났다는 사실만 봐도 그렇다. 지갑을 열기 전에 우선은 가진 품목들부터 잘 살려 자기표현을 해보는 것이다.

문득 옷장에 들어있는 나의 빨간 스웨터를 떠올린다. 여전히 따스함이 그리운 계절이기도 하지만, 나이 예순이 머지않아서인가 보다. 스위스에선 60세 생일이면 빨간 스웨터를 선물하며 장수를 기원하기에 시니어를 ‘빨간 스웨터’라 부른다지 않는가. 요즘이야 60은 거의 청춘일진대, 모처럼 빨간 스웨터를 입고, 빨간 립스틱도 칠해볼까. 머리가 희끗희끗할수록 더 어울릴 빨간 스웨터 한 장이면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금방 패셔니스타가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