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조국에 '고려미술관' 통째로 바칠 겁니다

아버지를 여읜 스물아홉 아들의 두 어깨에 얹힌 가업(家業)의 무게는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가 그래 왔던 것처럼 파친코와 이자카야(일본식 술집) 등을 운영하며 억척스레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도자기와 그림들을 전시한 미술관 운영에 쏟아부었다.

사재를 털어 식민지 시절 반출돼 일본 각지를 떠돌던 조선백자·고려청자·그림 등 문화재 1700점을 되찾고 1988년 보금자리인 교토 고려미술관을 설립한 재일교포 실업가 정조문(1918~1989), 그리고 아들인 정희두(55) 고려미술관 상무이사 얘기다.

그렇게 26년이 흐른 뒤, 아버지와 아들은 문화재를 구출해낸 영웅과 후계자로 스크린에 등장한다. 정조문의 삶을 그린 독립 다큐 영화 '정조문의 항아리(감독 황철민)'가 올 하반기 개봉을 앞두고 오는 21일 오사카에서 한국문화원 주최로 시사회를 연다. 교포 2세 정희두 이사가 영화의 '주요 출연진'이다.

지난 6일 교토 고려미술관에서 만난 그는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더욱 뜻깊은 영화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제작비 6000만원은 아버지와 고려미술관을 사랑한 한국·일본인 각 250명이 댔어요."

아버지 정조문은 어린 시절 부모를 따라 교토에 온 뒤 초등학교 중퇴 후 막노동부터 시작했다. 30대 때 우연히 접한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빠진 뒤 사업으로 모은 돈을 일본으로 빠져나간 한국 문화재를 되찾는 데 쏟았다. 그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 유카와 히데키, 교포 소설가 김달수 등 당대 문화인들을 필진으로 섭외해 1969년부터 13년 동안 계간지 '일본 속 조선문화'를 발간하며 교포사회에 자긍심을 불어넣었다. 이후 1988년 해외에 있는 유일한 한국문화재 전문 전시관인 고려미술관을 설립했고 넉 달 뒤 세상을 떠났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 아버지와 빼닮은 외모를 가진 정희두 이사다. 대학 전공도 고고학(나라대)을 택했다.

"미술관 앞뜰에 세워진 석탑은 1960년대 고베 부근의 논바닥에 처박혀 있던 돌더미들을 조립한 겁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조립해서 보존하지 않을 거면 내게 팔라'고 땅주인에게 말한 뒤 당시 돈 2000만엔을 주고 사들였어요. 1700여 소장품 하나하나가 이렇게 사연을 간직하고 있어요. 다행스러우면서도 안타까워요. 일본 전역에 있을 한국문화재 중 우리가 소장한 건 채 1%도 되지 않거든요."

정 이사는 반출 문화재를 신고하지 않고 소장하고 있을 일본인들에 대해서도 "무조건 돌려달라는 게 아니다. 가치를 제대로 연구하고 알리기 위해서도 현황 파악이 중요하다. 문화재 가치를 공유할 방안이 있을 것"이라며 연락을 부탁했다.

아버지 정조문은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교포 중에서도 한국과 북한 어느 한 쪽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채 조선적(朝鮮籍)으로 살았다. 그만큼 통일에 대한 열망이 컸다.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에게 '25년 뒤 통일될 테니 그때 조국에 미술관을 헌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26년째 되도록 유언을 못 지켰어요. 하지만 확신은 들어요. 좀 늦었지만 제 대(代)엔 반드시 통일이 이뤄져 아버지의 소망이 이뤄질 거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