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고 있다. 2월의 햇살은 더없이 따사롭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니 바람이 제법 일렁이는 모양이다. 문득 바람에서 봄 냄새가 난다. 순한 봄바람이 겨울에게 그만 떠나라고 등을 미는 모양이다. 비쩍 마른 몸으로 빈 나뭇가지를 붙잡고 겨우내 버티던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다.
흔들리는 나뭇잎이 꼭 나를 닮은 것 같다. 떠나야 하는데 미련이 남아 서성대는 꼴이. 우두커니 서서 솜털 뽀송뽀송한 목련꽃봉오리를 바라본다. 내가 떠나고 나면 저 목련 나무에도 봄이 찾아오고 꽃이 필 것이다. 목련나무는 알고 있을까. 다시는 내가 연둣빛 봄을 끌어올려 싹을 틔우는 자기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어느 아름다운 봄날,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아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름 모를 새 한 마리가 목련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하늘 끝으로 날아간다. 새가 날아간 하늘 끝에 구름이 두어 점 흘러가고 있다. 구름이 흘러가는 것은 바람의 생각일까. 구름의 생각일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저 끝까지 가 보는 것. 그저 그뿐이 아닐까. 내가 살아온 생이 그러하듯.
사무실을 휘이 둘러본다. 횅하다. 며칠 있으면 떠나가야 하는 곳. 뒷사람에게 혹여나 폐 끼칠까 봐 미리미리 사무실 정리를 한 탓이다. 책상 위에 어지러이 널려있던 잡동사니들도 치운 지 오래다. 빼곡히 꽂혀있던 책꽂이도 텅 비어 있다. 마지막까지 필요한 서류철 서너 개가 풀이 죽어 주저앉아있다. 빼곡히 들어찼던 책꽂이 안에서도 허리 곧게 펴고 꼿꼿이 서 있던 서류철들이었는데. 이들과도 곧 이별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은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을 때가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너무나 느려서 그날이 그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더 크고 더 넓은 세상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천천히 흘러가는 물보다는 세차게 흘러가는 물이 더 멋있게 보였다. 나도 더 넓은 세상을 흘러가며 때로는 폭포를 지나고 요동치다 때로는 넓은 벌판을 흘러가고 싶었다. 흘러간다는 것은 결국 살아 움직이는 것이지 싶었다. 그게 한세상 사는 맛이지 싶었다. 무슨 변덕일까. 지금은 그냥 이 자리에서 미동도 하고 싶지 않다. 머리와 가슴이 제멋대로다.
내 마음을 알았을까. 또다시 창밖에 바람 분다. 그 바람이 창문을 넘어와 마음 밭에 스며든다. 바람소리가 마음 밭을 휘젓다가 급기야 등을 밀어내고 있다. 흘러야 한다고, 머물면 썩는다고 외치고 있다. 틀린 말이 아니다. 움직여야 하는 것은 움직여야 한다. 자동차도 너무 오래 세워두면 녹이 슬고 만다. 물도 흘러가야 이끼가 끼지 않는 법이다.
어느 선배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이 가장 아름답게 보일 때가 순리에 따라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라 했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 나도 공감하는 바였다. 헌데 요즈음 가만히 생각해보면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 않다. 자꾸 거스르고 싶은 생각이 순간순간 머리를 든다.
인생 이 막의 새벽이 문을 열고 서 있다. 망설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오라고 손짓한다. 그래 흘러가야 할 때 흘러가야지, 거기도 해가 뜨고 달도 뜨고 지겠지. 어쩌면 일 막에서 보다 더 바람 불고 소용돌이치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떠랴. 일 막에서 다지고 다진 내공이면 그까짓 것쯤이야 가볍게 넘을 수 있겠지. 흘러간 시간이 어디쯤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도 안다. 흘러갈 시간 속에도 그리움이 있고 이별도 있겠지. 또 아는가. 멋진 도반(道伴)한 사람 다가와 손잡고 같이 갈지, 그럼 된 거다. 암 되고말고. 희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