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청 설명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 하려고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 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현재 소개 중인 국보 시리즈의 제17호(무량수전 앞 석등), 제18호(무량수전)에 이어서 제19호는 부석사 조사당이다. 17호부터 19호에 이르기까지 연거푸 3건의 국보가 부석사 문화재인데 무량수전에 모신 아미타여래와 조사당 벽화 역시 국보이다. 이 두 점의 국보는 제45호, 46호로 지정번호가 조금 떨어져 있어 나중에 따로 소개하기로 하고 이번에는 조사당에 대하여 살펴본다.
조사(祖師)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의 선덕(先德). 후세 사람의 귀의(歸依)와 존경을 받을 만한 승려, 또는 한 종이나 파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주장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이다. 즉, 불교의 한 종파를 처음 개창한 승려를 이어 법통(法統)을 계승한 후대 승려들이 우리가 조상을 모시듯이 창시조 승려를 모시고 기리며 받드는 것을 말하는데 신라 하대에 이르러 구산선문이 개산하면서 산문별 개산조를 기리는 일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따라서 부석사의 조사당(祖師堂)은 부석사를 처음 창건한 의상대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초상화를 모시거나 그와 관련된 불교적인 상징물 등을 모신 전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사신앙은 선종(禪宗)에서의 신앙형태이지 의상의 화엄 사상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형태였으니 부석사에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이 있다는 것이 사실은 이상한 일이다. 이에 대하여 일부에서는 아마도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던 시기를 지나면서 부석사에도 화엄종에는 맞지 않지만, 유행에 따라 이를 세운 것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조사당(祖師堂)
부석사에 들러 안양문에 올라서 무량수전과 앞마당의 석등, 무량수전 안에 있는 아미타여래좌상까지 국보 3점에 취하다 보면 그 위쪽에 또 다른 국보인 조사당과 그 안에 있는 벽화 등 국보 2점이 더 있음을 잊고 그냥 하산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 더 인내를 갖고 무량수전 동쪽에 서 있는 석탑을 지나 산길을 잠시 오르면 갑자기 속세를 벗어나듯 절집조차 번거롭다는 느낌으로 지금까지의 복잡함이 사라지면서 차라리 절집은 이래야 하지 않나 싶을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다 못해 오롯한 모습으로 서 있는 작은 건물이 나타난다. 바로 의상대사를 모신 부석사 조사당(祖師堂)이다.
때마침 눈이 내려 천지가 새하얀데 조사당으로 오르는 산길에는 좌우로 나지막하게 산죽이 푸릇푸릇 보이고 있었으며 원래 흙길이었을 텐데 바닥에는 돌을 깔아놓아 그닥 미끄럽지 않게 오를 수 있었으니 부석사 조사((祖師) 스님을 뵈러 오르는 길이 매우 아름다웠다. 산길은 한번 살짝 굽이쳐 감돌아 오르는데 눈을 들어보니 조사당 건물이 보인다.
건물에 비하여 지붕이 전후좌우로 길게 나와서 지붕이 커 보여 엄숙함과 안정감을 주며, 기둥 위에만 포를 얹은 주심포 방식인데 포의 결구가 매우 간결하여 단순해 보이며 도리가 7개인 7량 규모의 아담한 규모로 조사당 건물로는 제격이다.
그러나 조사당을 둘러보는 가운데 이처럼 역사적이고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국보 제19호 고건축물에 철제 보호망을 둘러놓았는지 눈살이 찌푸려진다. 보호 철망 안에는 성장이 좋지 못한지 몇 년째 비리비리해 보이는 나무 한 그루가 보이는데 전설에 따르면 의상대사가 평소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았다고 하는 선비화(仙扉花)나무라고 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인듯하다.
그러다 보니 방문객들이 너도나도 만져보거나 조금씩 꺾고 가져가려는 시도가 있어 보호 목적으로 그랬나 싶지만 아무래도 적절한 조치는 아닌 듯싶다. 보호목적상 꼭 필요하면 나무를 옮겨 심어 잘 보호하고 성장케 관리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며, 전설에 의지하여 국보 건물 앞 절반을 저렇게 쇠창살로 가두어 놓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해 보인다. 재검토를 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