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 '3不 심리'… 예금만 늘었다

"창업하면 10명 중 7명은 망하잖아요. 퇴직금으로 2억원을 받는데 일단 은행 예금에 안전하게 넣어두고 일자리부터 찾을 겁니다."

오는 4월 은퇴를 앞둔 김모(59)씨는 퇴직금을 받으면 바로 은행 예금에 꽉 박아두겠다는 생각이다. 이자가 연 1.9% 정도로 낮아 안타깝긴 하지만, 요즘처럼 자산시장 상황이 어지럽고 복잡한 시기에 예금만큼 안전한 곳은 없다는 생각에서다.

김씨처럼 생각하는 퇴직자나 금융자산가들이 늘어나면서 초(超)저금리 상황에서도 은행 예금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본지가 22일 4대 시중은행의 1년 만기 정기예금 추이를 조사한 결과, 정기예금 잔액은 2014년 1월 말 359조원에서 올 1월 말 367조5000억원으로 최근 1년 새 8조5000억원 증가했다. 같은 기간 정기예금 금리가 연 2.5%에서 연 1.9%까지 추락한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반면 국내 주식형 펀드 잔액은 같은 기간 1조원 줄어들어 56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예금 이자를 받아봐야 물가상승률을 감안하면 제로 금리에 가까운데 왜 은행 예금에 돈이 몰리는 걸까. 전문가들은 '3불(不) 심리'에서 답을 찾고 있다.

◇3불 사회… 예금 나 홀로 증가

3불이란 딱히 마땅한 투자처가 보이지 않고 전세금은 폭등하고 있어 미래에 대한 '불안(不安)'이 커졌으며, 펀드·주식 등 투자 상품에 돈을 넣었다가 돈을 까먹은 경험 때문에 불신(不信)감이 커졌고, 투자에 딱히 관심이 없어 공부도 하지 않는 불학(不學) 현상을 의미한다.

앞서 사례로 등장한 김씨처럼 자산을 쥔 고령자들은 장수(長壽) 불안감에 은행 예금을 선호하고, 경제활동이 한창인 30~50대는 급등하는 전세금 부담에 투자에 나서기를 꺼린다. 이상건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는 "유럽·중동 등 글로벌 시장 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이어서 돈 냄새를 따라 빨리 움직이는 스마트 머니 말고는 모험에 나서지 않는 분위기"라며 "일반인들은 불안한 마음에 낮은 금리라도 예금에 돈을 넣고 '안전한 궁핍'을 감수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몇 년째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국내 증시의 부진도 '예금 편식'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회사원 이모씨는 "코스피지수에 연동해 움직이니까 다른 펀드에 비해 안정적이라는 말에 인덱스 펀드에 가입했는데 1년 수익률이 1%도 안 된다"면서 "이렇게 성과가 나쁠 줄 알았다면 그냥 예금에 넣어놓을 것을 왜 펀드에 넣어 수수료나 떼이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김규범 SC은행 부장은 "과거 펀드나 주식 등에 투자했다가 원금이 훼손되어 손해 본 투자자들 사이에선 투자 상품에 대한 불신이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기예금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는 뜻"이라며 "아무리 주가연계증권(ELS)이 인기를 끈다 해도 한 번도 파생상품에 투자해보지 않은 사람은 섣불리 투자를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점점 일본 닮아가는 '재테크 행태'

우리보다 앞서 고령화를 겪고 있는 일본은 제로(0) 금리 수준에서도 예금 선호 현상이 뚜렷했고, 그 현상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말 기준 예금 잔고가 전년 대비 4.2% 증가한 620조엔을 기록해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웠다. 버블 붕괴 후였던 1991년 말(400조엔)의 1.5배 수준이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일본은 인구 고령화로 안전자산 선호 현상이 강한데, 특히 인구 비중이 가장 높은 단카이(전쟁 직후 1947~49년생) 세대가 퇴직금을 예금에 넣어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시대에는 현금이 가장 안전한 투자처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예금 선호는 결과적으론 현명한 재테크라고도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베이비부머(1958~1963년생) 세대는 자산 축적이 일본 단카이 세대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서 예금만 고집해서는 노후 대비가 어렵다는 데 문제가 있다. 강창희 트러스톤연금포럼 대표는 "사람들은 예금이야말로 안전한 자산이라고 생각하지만 초저금리 시대에는 오히려 손실 위험을 내포하는 위험 자산이 될 수 있다"면서 "원금 보장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무작정 정기예금에 돈을 넣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재테크일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 투자자들은 노후 대비 투자금 대부분을 뮤추얼펀드에 넣고, 은행 예금은 돈을 보관해두는 용도 정도로 활용한다. 우리처럼 정기예금에 돈을 묵혀두는 일은 찾아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