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2.24 10:04

반백의 한 남자가 울고 있다. 비행기 탑승 통로에 주저앉아 온몸을 흔들며 울고 있다. 가지 못 한 길에 대한 통한(痛恨)의 울음소리가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중년의 한 여자가 울고 있다. 공항 의자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고 있다. 돌아서 버린 길에 대한 회한(悔恨)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


영화 ‘쎄시봉’

[시니어 에세이] 돌아갈 수 없는 그리움

영화 ‘쎄시봉’ 중에서 20년 후 재회한 뒤에 벌어지는 장면이다. 통한(痛恨)과 회한(悔恨)이 얽힌 슬픔이 내게도 눈물이 흐르게 했다. 너무나 깊이 꽁꽁 봉인해 두었기에 나 자신도 잊고 있었던 추억들이 오늘 밤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술이 마시고 싶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술이 마시고 싶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면서, 내내 술이 마시고 싶었다.

내가 술이 마시고 싶었던 것은 그놈의 노래 때문이었다. 노래 하나가 영화관에서부터 내내 따라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가만가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멈추려야 멈출 수가 없었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나는 먼지가 뽀얗게 이는 신작로 길을 털털거리는 버스에 앉아 있었다. 바람은 살랑거리고 가로수 벚나무에서 연분홍빛 꽃잎이 눈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가 슬며시 내 손을 잡더니 가만가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게~~ 없네,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그의 옆얼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근태와 자영이 쎄시봉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자영이었고 그가 근태였다. 70년대가 청춘이었던 우리 모두가 근태였고 자영이었다. 그리 잘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나를 몰입하게 한 것은 내가 그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글이라고 쓴답시고 앉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건 순전히 마음속 깊은 곳에 근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자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움

그리움이 깊을수록 꽁꽁 봉해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숨겨 두고 산다. 오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나 그리움은 더 깊이 더 어두운 곳에서 저 혼자 익어 간다. 그러다 세상 사는 데 지치고 힘들 때. 그 어디서고 위안을 찾지 못할 때 오늘처럼 추억이란 이름으로 불쑥불쑥 찾아든다.

찾아든 추억 속에 우리들의 빛나던 청춘이 살고 있었다.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춘다. 야전(야외용 전축)에서 CCR의 ‘헤이 투나잇’, ‘모리나’, ‘프라우드 매리’, 톰 존스의 ‘킵온러닝’이 흘러나온다. 풀밭이 춤을 추고 바닷가 모래밭이 춤을 춘다. 십 인치 나팔바지가 꽃무늬 미니스커트가 춤을 춘다. 머리 위에서 찌그러진 교모(校帽)도 삐뚤빼뚤 덩달아 춤을 춘다. 단발머리가 나풀거리고 얼룩무늬 교련복이 사방팔방으로 비비고 또 비빈다.

새로운 말들이 태어났다. ‘써니텐 타임’(고고 춤을 추는 시간, ‘흔들어주세요’라는 CF에서 나온 말)이란 신조어가 태어났고, ‘고부갈등’(고고 출까 블(부)루스 출까 고민)이란 유행어가 나오는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춤을 추는 건 좋았지만, 한껏 고조된 흥분이 진정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몸만 움직일 수 있으면 모두 춤을 추었다.

어른들은 나라가 망할 징조라고 개탄했다. 급기야 밤 10시가 되면 라디오에서 ‘사랑의 종소리’가 울리고 부드러운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청소년 여러분, 밤이 깊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달뜬 청춘들의 귀에 들어갈 리가 있었겠는가. 기함한 어른들이 세상이 말세라고 하건 말건, 날라리라고 손가락질을 하건 말건, 춤을 추고 또 추었다. 그 속에 근태와 자영이가 있었다. 인생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던 나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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