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에 걸린 세상… 영화로 치유하고 싶다

이와이 슌지(岩井俊二·52) 감독을 만나면 "오겡키데스카(お元氣ですか·잘 지내세요)?"라고 묻고 싶었다. 눈밭에 메아리치던 한 여인의 간절한 외침으로 기억되는 영화 '러브레터'를 만든 지 20년. 오는 4일까지 서울 CGV청담씨네시티에서 열리고 있는 마리끌레르 영화제 참석차 서울에 온 이와이 감독을 만났다. 영화제에선 특별전을 통해 그의 영화 '뱀파이어'(2011) '하나와 앨리스'(2004)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을 상영한다. 그는 질문을 받으면 '음, 그렇군요…' 한 뒤 한참 생각에 잠겼다. 두꺼운 뿔테 안경 속 두 눈을 몇 번 깜빡인 뒤 신중하게 답했다.

많은 이가 '러브레터'로 그를 기억하지만 이와이는 "나는 러브스토리나 멜로라 생각하고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고 했다. "비좁은 골목길이라도 세계를 다채롭게 드러낼 수 있는, 가슴에 남는 순간을 포착하려 애씁니다. 영화마다 달라 보이겠지만, 난 늘 똑같은 안경을 쓰고 만들어 왔어요."

그의 영화적 관심은 최근 수년간 사회적이며 무거운 주제 쪽으로 옮아 왔다. 2011년 그는 일본 3·11 대지진 이후 다큐멘터리 '3·11: 이와이 슌지와 친구들'을 만들었다. 반향도 컸다. 쓰나미 피해가 극심했던 센다이 출신인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했다. "죽은 사람에 관한 기억을 얘기한 영화 '러브레터'를 만들었지만 실은 '내가 정말 죽음을 몰랐던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생존자들은 죽은 사람들을 여전히 기억 속에 존재하는, 어딘가 있을 수도 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기억이 지속된다면 죽어도 진짜 죽은 게 아닐 수 있겠다 싶었지요. 나에 대한 기억이 사라진다면 존재 의미도 사라지는 것 아닐까, 단순히 살아 있음보다 기억이 더 소중한 것 아닐까…."

기억은 그의 영화들을 관통해온 주제다. 그는 "영화감독은 무언가를 기억해내는 직업"이라고도 했다. "3·11 참사를 지켜본 뒤, 기억과 상상력을 남을 위해 써보자고 생각했어요. 뭐든 돈으로 살 수 있는 시대라지만 여전히 돈으로 안 되는 것들이 있어요. 상상력으로 남을 이해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지요. 대지진 생존자 다큐도 그런 맥락에서 만들게 됐습니다."

이달부터 3·11 이후와 관련된 극영화 촬영을 시작한다. 그는 "방사능이나 후쿠시마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대지진으로 내가 생각하고 깨달은 것을 넣으려다 보니 왠지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극영화는 강한 메시지를 넣는 것이라기보다 무언가 숙성돼 깊은 맛을 내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런 이야기를 만들고 싶습니다."

지난주 일본에선 '하나와 앨리스' 이전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하나와 앨리스 살인 사건'이 개봉돼 호평을 받고 있다. 이번 영화제에서 한국 관객과 만나는 '뱀파이어'는 자살하려는 여자들의 피를 마시는 남자 이야기. 강렬하고 무거운 영화다. "피에 집착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예요. 피를 탐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피를 통해 인간 생명과 가장 깊이 관계할 수 있었던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기억'이라는 테마가 뱀파이어 사내가 욕망하는 '피'의 대구(對句)처럼 느껴진다고 하자, 그는 "일리 있는 이야기"라며 미소를 지었다.

영화로 '기억'을 붙잡고 탐구하는 이 남자에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겪고 원전을 놓지 못하는 세계도, 전쟁을 겪고도 재무장을 시도하는 일본도 기억상실증에 걸린 건 아니냐'고 물었다. "맞는 말이에요. 살아가며 우리는 계속 주위에 선을 긋지요. 그 선이 이기적이라면 관계도 이기적이 됩니다. 일본과 외국의 관계도 마찬가지죠. 더 많은 사람이 상대의 처지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세상의 기억상실도 치유되지 않을까요? 존 레넌이 '이매진'에서 노래했던 세계가 좀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영화로 이 얘기를 계속하게 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