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홀 '노 보기(no bogey)'… 퍼펙트 박인비

나흘간 72홀 동안 단 하나의 보기 없이 버디 15개를 잡아내면서도 전혀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박인비(27)는 우승 퍼트를 성공시키고 주먹을 불끈 쥐며 처음 웃었다.

박인비가 샴페인 세례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다 악수를 청한 스테이시 루이스(30·미국)나 포옹을 한 리디아 고(18)의 얼굴엔 패배가 남긴 아쉬움 말고도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들은 앞으로도 여자 골프 정상 자리를 놓고 '지독한' 박인비와 승부를 벌여야 하는 운명이다.

8일 싱가포르의 센토사 골프클럽 세라퐁 코스(파72·6600야드)에서 열린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HSBC 위민스 챔피언스 4라운드는 여자 골프의 빅뱅이었다. 세계 랭킹 1~3위인 리디아 고와 박인비, 루이스가 챔피언조에서 우승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처음 벌어져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결과만 놓고 보면 2타 차 선두로 나선 박인비가 2타 차로 우승한 평범한 전개. 그러나 무더위 속에서 4시간 30여분 동안 여자 골프의 별들이 기(氣) 싸움을 벌이다 결국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sin)'라는 별명을 지닌 박인비가 승리한 '고요한 열전(熱戰)'이었다.

박인비는 이날 보기 없이 버디 2개를 잡아 합계 15언더파 273타로 정상에 올라 LPGA 투어 통산 13승째를 기록했다. 2타 차 공동 2위로 출발했던 리디아 고는 버디 5개, 보기 3개로 2타를 줄여 2위(13언더파)를, 루이스는 버디 2개, 보기 2개로 타수를 줄이지 못하고 3위(11언더파)를 차지했다. 박인비는 지난해 결혼 3주 만인 11월 LPGA 타이완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이후 4개월 만에 다시 정상에 올랐다.

공동 선두로 출발해 나흘 동안 선두를 놓치지 않은 박인비는 상금 21만달러(약 2억3000만원)를 받았다. 박인비는 이번 우승으로 지난 2월 리디아 고에게 내준 세계 1위 자리를 되찾진 못했지만 점수 차를 좁히며 추격에 나섰다.

초반 분위기는 호주 여자오픈(LPGA 투어)과 뉴질랜드 여자 오픈(유럽투어)에 이어 3주 연속 우승을 노리던 리디아 고가 잡았다. 리디아 고는 4·5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으며 공동 선두에 올랐다. 리디아 고가 7번 홀(파5)에서도 버디를 잡았지만, 박인비도 버디를 잡으며 공동 선두 자리를 유지했다. 루이스는 4번 홀에서 버디를 잡았지만 이후 샷 난조를 보이며 우승 경쟁에 합류하지 못했다.

박인비가 쫓기면서도 흔들림없는 플레이를 하자 오히려 리디아 고가 8번 홀(파3)에서 보기를 했다. 지난해 박인비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승부에 강하다고 해서 LPGA 홈페이지로부터 '침묵의 암살자 주니어'라는 별명을 얻었던 리디아 고지만 이날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박인비가 11번 홀(파4)에서 5m 거리의 까다로운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2타 차 선두로 다시 간격을 벌리자, 리디아 고는 12번 홀(파5) 3퍼트 보기에 이어 13번 홀(파4)에서도 보기를 했다. 박인비는 남은 홀에서 여유 있게 파를 지키며 추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인비의 우승 원동력은 4라운드에서 그린 적중률 100%를 기록할 정도로 정교한 아이언 샷이었다. 퍼트 수가 34개로 많았지만 아예 타수를 잃을 위험한 상황을 만들지 않았다. 박인비는 지난주 혼다 타일랜드 대회 3라운드 17번 홀부터 92개 홀 연속 노 보기 행진을 벌이고 있다. 지난겨울 뒤늦게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양가 부모님을 미국 집에 초대하는 등 분주한 일정을 보냈던 박인비가 다시 정상급 샷을 선보이면서 리디아 고와 치열한 힘겨루기가 벌어질 전망이다.

박인비는 "리디아 고와 스테이시 루이스는 어차피 자주 만날 것이고 강한 상대와 붙으면 우승 못 해도 위안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서 편했다"며 "이렇게 이겨서 더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올해 브리티시 여자오픈 우승으로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이루고 싶다고 밝힌 박인비는 "드라이버부터 웨지까지 모든 샷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돼 올 시즌이 무척 기대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