姑婦갈등·어머니의 눈물… '종이 그림'이 그 恨 달래주네

홍두깨로 두드려 한지를 편다. 염료는 감, 도토리, 치자…, 코팅제는 콩즙이다. 우리의 재료에서 시작한 작업이 향하는 곳은 우리네 여인이다. 명성황후, 허난설헌, 논개부터 어머니까지 한(恨)을 품은 한국의 여인이다.

30여년간 전통 채색화 재료를 시험해온 동양화가 정종미(58·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교수·사진)가 4월 12일까지 고려대 박물관에서 개인전 '여성성에 바치는 헌사 4―여성을 위한 진혼'을 연다. 화판에 천연 염색한 종이와 천을 붙여 여인을 표현한 부조 작품인 '종이부인' 시리즈, 고려 불화 도상에 한국 여인의 얼굴을 조합한 '오색 보살' 시리즈 등 대표작 80여점이 나왔다.

정종미는 그 또래에 몇 안 되는 중견 여성 동양화가다. 게다가 작업 시작 후 줄곧 '여성'을 주제로 삼았다. 천과 씨름하며 바느질하고, 염색을 반복하는 작업 과정도 규방 여인의 가사 노동과 닮은꼴. 회고전에 가까운 이번 개인전에도 어김없이 '여성'을 간판으로 내세웠다. 그것도 억울한 영혼을 달래기 위한 '진혼(鎭魂)'이다.

왜 그리 '여성의 한'에 집착할까. 배경만 보면 구김 하나 없을 것 같은 삶이기에 더 의문이 든다. 대구에서 의사 집 딸로 태어나 서울대 미대를 나왔고, 변호사 남편을 뒀다. 작가는 "이젠 얘기할 때가 된 듯하다"며 비슷한 질문을 받았을 때마다 얼버무리고 넘어간 '진짜 이유'를 털어놓았다.

세 여인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버지가 참 많은 여인을 사랑하셨다. 그 모든 걸 인내하고 어머니는 우리에게 지고(至高)한 사랑을 베푸셨다. 어머니는 내게 성모이자 부처였다." 어머니의 희생이다. "갈 곳 없어 나를 돌보며 우리 집에 살던 할머니가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위안부 할머니였다. 가족에게서조차 버림받으신 분이었다." 역사에 희생당한 여인의 슬픔이다. "결혼 후 극심한 고부 갈등을 겪고 우울증에 빠졌다. 살기 위해 작품 안으로 도망쳤다. 이젠 그 터널을 지나 과거와 화해했지만…(웃음)." 며느리의 고뇌다. 질긴 종이 위에 핀 '종이여인'은 그를 둘러싼 여인의 초상이자, 그의 자화상이었다. 전시 문의 (02)3290-15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