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옥상 텃밭에 올라갔다. 눈인지 비인지 모를 진눈깨비가 내리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애써 찬 기운을 뿜어내지만 바람 속엔 이미 봄기운이 가득 들어있다.
얼어있던 텃밭도 봄기운에 녹아 있고 산 쪽에서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려온다. 서울에서 새소리와 산다는 것은 행복이다 싶은 생각에 저절로 입가에 웃음기가 가시지 않는다.
텃밭 이곳저곳을 둘러보는데 이미 겨울 빛깔이 아닌 듯 싶다. 어딘가 모르게 푸릇푸릇한 느낌이 나를 흔든다. 봄 냄새까지 물씬 풍기는 느낌. 이게 뭘까 싶어 그 근원을 찾으려 텃밭을 들여다 본다. 냉이다. 분명 냉이다. 아직은 땅 빛깔에 더 가까운 냉이가 살고 있다. 갑자기 짙은 봄 냄새가 훅 끼쳐 온다.
겨울 텃밭에 냉이가 긴 엄동설한에도 혼자 봄을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어떻게 이 아파트 옥상까지 날아 들어와 뿌리를 내렸는지 자못 궁금하다. 꽃보다는 뿌리의 향기가 더 짙은 냉이가 하도 신기하여 손으로 뽑아본다. 뿌리를 뽑아 그 향내를 맡아보면 여기까지 날아온 속내를 들을 수 있을까 하여서 뽑아본다. 호락호락 속내를 털어놓고 싶지 않나 보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뽑히지 않는다.
땅속은 아직 겨울인가 보다. 겉은 얼어있지 않아도 땅속은 아직 언 땅인가 보다. 언 땅이 놓아주지 않는 냉이뿌리를 가질 수 없는 열망이 다시 냉이를 잡아당기게 한다. 언 땅이 냉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흙냄새도 제대로 나지 않는 너 같은 얼치기 농부에게 내줄 수 없다고 더욱더 꼭 끌어안는듯 하다. 냉이는 냉이대로 언 땅을 있는 대로 잡고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너에게 질소냐 싶어 다시 한 번 힘껏 당겨본다. 엄동설한에도 이겨 낸 냉이 잎 한 잎이 우두둑 뜯겨 내 손을 따라온다. 팔 한 자락을 잘라 내더라도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모양이다. 내 욕심이 과했나 보다다. 괜히 쓸데없이 힘자랑하다가 상처만 입힌 꼴이 되어 버렸다. 조금만 기다리면 언 땅 스스로가 놓아줄 것을 그걸 기다리지 못해 미안하단 생각이 물밀듯 밀려온다.
때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것을 배울 때인 모양이다. 다가가지 않고 다가오는 것들을 제대로 맞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나이인 것 같다. 그동안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살았다.
퇴직을 하고 무엇을 할까? 일 년여 전부터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은 이제 그때는 지나갔기 때문인 모양이다. 천천히 가면서 달리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달리느라 보지 못하고 밟아버린 것들을 찾아야겠다. 내 발밑에 밟혀 있던 것들을 일으켜 세우고 어루만질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