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하는 뽀로로… '이야기 할머니'가 떴다

"얘들아~모여라."

지난 17일 오전 서울 신도림동의 한 유치원.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박계순(66) 할머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부르자 29명의 푸른하늘반(6세반) 아이들이 '와~'하며 모여들었다. 주변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박씨는 "옛날옛적에 재주 많은 네 명의 친구가 한마을에 살았어요"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날의 이야기는 네 명의 어린 친구들이 모험을 떠나 악당을 물리쳤다는 '즐거운 모험'이란 옛날이야기. 귀를 쫑긋 세운 아이들은 박씨가 한쪽 코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악당을 콧바람으로 물리치는 장면을 흉내 내자 함께 콧바람을 '쉭쉭' 불며 깔깔 웃었다. 30분간 이어간 옛날이야기를 마치며 박씨가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악당을 물리치는 걸 뭐라고 하죠?"라고 묻자 아이들은 "협동이요!"라고 외쳤다.

어릴 적 손자를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던 '이야기 할머니'가 부활하고 있다. 유치원에서 유아(幼兒)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프로그램을 속속 도입하면서 박씨처럼 유치원에서 손자뻘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들의 활약이 늘고 있다. 이 유치원 조정녀(50) 원장은 "젊은 유치원 선생님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는 부족한 푸근함이 박 할머니의 강점"이라며 "이야기 수업을 도입한 이후 아이들이 눈에 띄게 공손해졌다"고 했다.

2011년 초등학교 교사로 퇴직한 박씨는 정부가 공인한 '이야기 할머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국학진흥원이 2009년부터 도입한 이른바 '이야기 할머니' 모집에 응시해 7대1의 경쟁을 뚫고 선발됐다. 이 자격은 경북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서 2박3일 동안 합숙 교육을 거쳐 동화 구연(口演) 시험에 통과한 56~70세의 여성에게만 주어진다. 옛날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스토리텔러'로 선발된 할머니들은 30주 동안 유치원 등 유아 교육 기관을 다니며 이야기 수업을 진행한다. 처음 경상북도 일부 지역 유아 교육 기관에서 시범 시행된 '이야기 할머니' 사업은 5년 만에 전국 6000여 유아 교육 기관으로 확산됐다. 박씨 같은 공인 '이야기 할머니'도 2000여명으로 늘었다. 박씨는 "교사로 활동했던 경험을 되살려 은퇴 후 '재능 기부'를 해보자는 생각에서 시작했는데 아이들과 어울리니 내가 더 젊어지는 느낌"이라며 "주변 할머니들 사이에서도 '이야기 할머니'가 되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문의가 많다"고 했다. 경북 안동에서 3년째 이야기 할머니로 활동하는 이꽃분(62)씨는 "아이들이 친할머니 대하듯 정(情)을 주니 친손자 같아서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TV 애니메이션과 스마트폰 게임에 익숙한 아이들의 반응도 좋다. 다른 수업 땐 유치원 교실을 오가며 천방지축 뛰노는 아이들이 이날 박씨의 이야기 때는 화장실조차 가지 않았다. 할머니들도 손자뻘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다. 박씨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할 때 목소리 높낮이를 수시로 바꾸고 몸동작도 했다. 푸른하늘반 담임교사 이유진(28)씨는 "할머니들이 마치 1인 연극을 하듯 열성적으로 이야기해주시는 걸 보면 '성대가 괜찮을까' 걱정이 될 정도"라며 "할머니 품과 무릎베개를 모르는 요즘 아이들에게 친할머니 같은 존재"라고 했다.

한 번 듣고 잊어버리는 것 같지만 '이야기 할머니 수업'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은 강하고 오래간다고 한다. 박씨는 "지난해 한 유치원에서 '용서'를 주제로 하는 옛날이야기를 했더니 다음 날 한 아이가 부부싸움 하는 부모에게 '서로 용서하세요'라고 말했다더라"며 웃었다. 류혜원 경북과학대 교수(유아교육과)는 "전통적인 '무릎 교육' 없이 큰 요즘 아이들에게 이야기 수업은 훌륭한 교재"라며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지혜를 전달해 줄 뿐 아니라 정서 함양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