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3.25 09:57

행복한 거장, 한대수

모두가 번안곡을 부르던 시절,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노래하는 장발의 청년이 있었다. 한국 1호 히피,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등의 수식어로 불리며 시대를 앞서간 거장은 어느새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하지만 그의 삶은 오늘도 음악이 되어 오선지 위를 수놓고 있다. 삶과 음악의 경계를 허문 거장을 만나 특별한 40년 음악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2층 커피숍에서 진행된 인터뷰. 거친 숨소리를 내며 거창한 털모자를 쓴 한대수 선생이 계단을 걸어 올라왔다. 숨을 고르길 기다린 뒤 인터뷰를 진행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힘찬 목소리로 악수를 청한 뒤 “액션!”을 외치는 그. 곧바로 인터뷰를 시작하자는 거였다. 인터뷰 시작에 앞서 차 주문을 권하자 예상을 깨고 쓰디쓴 커피가 아닌 캐머마일 티를 주문한다. 그러곤 또다시 “액션!”이라 말하고는 “허허허”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체면 차리기로 시작해 조금 어색함이 사라질 만하면 끝을 맺는 보통의 인터뷰와는 차원이 다른 허심탄회한 인터뷰가 시작됐다. 준비해온 질문 대신 무척이나 기분 좋아 보이는 그에게 대체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부터 물었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고통은 음악 인생을 지탱해준 힘

행복한 거장, 한대수

왜 내가 계속 웃는가 하면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하하하하. 비극이 심해지면 웃을 수밖에 없다니까요. 저는 항상 괴로워요. 왜냐하면 처음 20년 살던 여자와 헤어지고 굉장히 헤매다가 미국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는데, 문화적인 차이라는 게 극복하기가 쉽지 않아요. 일례로 제가 하루 세 끼 음식을 도맡아 하는데 음식을 세 종류로 따로 준비해요. 한국 음식을 못 먹는 아내를 위한 식사, 딸 양호를 위한 식사 그리고 내가 먹을 된장찌개. 이런 식이죠. 얼마나 힘든지 몰라요. 그리고 아내에게는 유전성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이 있어서 고생을 말도 못하게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직도 고독하냐고 하면 두말할 것 없이 엄청 고독하죠. 매일 아침 출근해서 돈도 벌어야 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고, 공연 준비도 하려니 힘들어 죽겠네요. 그런데 작곡도 그렇고 모든 작품 활동이라는 게 고통이 없으면 작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기뻐서 작곡하는 경우는 많지 않거든요. 부인도 양호하고, 아이도 잘 크고, 돈도 많고 그런데 노래가 쉽게 나오겠어요? 반 고흐처럼 어려운 상황, 모자란 상황 그런 데에서 훌륭한 음악과 그림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재작년엔가 베토벤에 관한 영화를 봤는데 그분도 굉장히 고통 속에 살았더라고요. 모차르트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제 많은 곡도 제 삶의 슬픔 속에서 탄생할 수 있었죠.


나이 들어감에 대하여

나이 들어가면서 좋은 점이 있냐고요? 없어요. 하하하하. 옛날에는 양호한 여인에게 “안녕~” 하면 “어! 안녕~” 이런 반응이 돌아왔는데, 지금은 “안녕!” 하면 “어? 저 할배 왜 이래?” 이러겠죠. 그리고 노화라는 게 굉장히 무서워요. 매일같이 기능을 자꾸 잃어가거든. 눈도 그렇고 귀도 어두워지고, 감각도 무뎌지고. 머리도 자꾸만 빠져요. 키도 2cm 줄었고, 어깨도 2cm 줄었어요. 옷 사이즈가 달라져서 친구들에게 옷을 나눠주는 상황이에요. 창의력도 떨어지고 너무 오래 살아서 어떤 경험에 대해 감동을 받기도 어려워요.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데, 저는 솔직히 굉장히 무섭다고 말해요. 무섭죠. 모르는 세계로 가는 건데 얼마나 무서워요. 그래서 사실상 나이 든다는 게 정말 어려운 상황인데, 그러한 과정에 대해 노래를 쓸 순 있겠죠. 같이 그 어려움을 나누는 거예요. “너도 무서우냐? 나도 무섭다” 하고요. 그렇게 쓴 곡 중에 ‘실수’라는 곡이 있어요. 가사가 이래요. ‘우리 친구 전은 강물에 빠지고’. 여기서 전은 유명한 조각가예요. 실제로 강물에 빠져서 죽었어요. 또 ‘우리 친구 정은 술독에 빠지고.’ 이 친구는 알코올 중독으로 죽었고. 그리고 또 사랑에 빠진 친구도 있고. 뭐 이런 식의 가사인데, 현황이 어떠냐 하면 결혼식만큼 장례식도 자주 가는 상황이에요. 얼마 전에도 장례식에 다녀왔는데 보통 일이 아니에요. 저도 술을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몸이 잘 안 받아서 자제하고 있어요. 딸을 위해서라도 건강을 지켜야 해요.


60대 남자를 철들게 한 딸, 양호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애 키우는 거예요. 학교 숙제가 너무 어려워요. 저는 초등학교 때 ABCD만 배우고 끝났거든요. 근데 양호는 1학년부터 ‘숲 속에는 부엉이가 울어요.’ 이런 걸 받아 적어야 해요. 얼마나 어렵겠어요. 다른 부모님이랑 얘기해보면 중고등학생은 저녁 11시까지 공부를 한대요. 미리부터 정말 겁나요. 허허. 제가 생각하는 게 이렇게 아이 낳기 전과 완전히 달라졌어요. 아이 낳기 전에는 아무 데나 가서 살고 돈 있으면 파티하고 돈 없으면 라면 먹고. 그렇게 살았거든요. 그럭저럭. 오래 살 필요도 없었고. 음악이나 하다 가자 그랬는데. 애를 낳은 뒤로 ‘자유는 책임이구나, 사랑은 희생이구나’ 이런 걸 배우고 있어요. 갑자기 뒤늦게 나이 70 다 돼서 한 방 맞았어요. 딸이 굉장한 가르침을 주는 거죠. 딸과는 친구처럼 지내는 편이에요. 저를 아주 편하게 대하죠. 저는 그게 참 좋더라고요. 또 딸을 키우면서 여자들에 대한 생각과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요. 여자가 겪게 될 일이 남자보다 훨씬 많다는 걸 느끼고, 주의해야 할 점도 너무 많더라고요. 그걸 뼈저리게 느끼면서 과거에 제가 여자들에게 실수를 많이 했다는 걸 느껴요. 뒤늦었지만. 만약 양호가 ‘혼자 세계 일주를 하겠다’ 그러면 사실 보내기 어려울 것 같아요. 아들이 가겠다고 하면 잘 가라고 하겠지만. 그런 차이가 있더라고요. 딸을 위한 곡을 만들기도 했는데 ‘양호야 양호야’라는 곡이에요. 이번 공연에 포함할지 말지는 아직 고민 중입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청소년기

행복한 거장, 한대수

베트남 전쟁 때 제가 미국에서 10대를 겪었거든요. 그때 저는 히피 운동에 완전히 꽂혀 있었죠. 아버지는 제가 백일 때 서울 공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셨는데 갑자기 실종되셨어요. 어머니는 몇 년 후 재가하셨고요. 제가 고등학생 시절에 아버지가 발견되긴 했지만, 주로 할아버지 손에 자랐다고 봐야죠. 저희 할아버지는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세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지낸 분인데, 제가 수의학을 공부해서 질 좋은 우유를 생산해 우리나라 국민 건강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은 했는데 너무 징그러워서 못하겠더라고요. 대신 사진예술에 빠져들게 돼 뉴욕에 갔는데 집에서는 사진은 공부가 아니라고 하시면서 모든 지원을 끊어버리셨죠. 당시 뉴욕의 괜찮은 아파트 임대료가 300달러 정도 했는데, 돈이 없으니까 50달러짜리 스패니시 할렘가의 아파트로 가서 살았어요. 낮에는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했는데, 묘하게 별생각 없이 일하러 간 곳이 지금도 관광명소로 유명한 ‘세런디피티 3’이라는 곳이었어요. 1명을 뽑는데 20명이 지원을 했어요. 그런데 어린 동양인 소년이 특이해 보였는지 내가 뽑혔어요. 그곳이 마릴린 먼로,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키 오나시스 이런 분들의 단골 음식점이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손님은 존 레넌과 오노 요코예요. 그렇게 그곳에서 많은 유명인을 만나고 여러 경험을 하며 사진 공부를 했는데 사진에서 많은 음악적 영감을 얻게 됐죠. 음악과 시각적인 것이 아주 잘 맞거든요. 퀸의 프레디 머큐리, 비틀스의 존 레넌 그분들도 다 그림 공부를 했고, 앤디 워홀은 벨벳이라는 언더그라운드 그룹의 매니저를 하기도 했죠. 음악은 제가 전혀 공부를 못했어요. 원래 엘비스 프레슬리를 정말 좋아했는데, 그분은 너무 우월해서 나는 가수가 될 생각을 할 수도 없었죠. 근데 비틀스라는 가수가 나왔는데 기타를 치면서 그냥 자기 인생을 얘기하더라고요. ‘나도 저건 할 수 있겠다’ 생각했어요. 그 뒤로 밥 딜런을 보니까 이 사람은 노래도 그렇게 잘 부르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하모니카 좀 불고 그런데 철학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얻어서 커피숍에 가서 주말마다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한국에 와서 세시봉에서도 그렇게 노래를 하게 됐고요.


한국 최초의 싱어송라이터

제가 세시봉에 가서 공연한 날 MC로 이백천 씨가 왔더라고요. 당시 트윈폴리오의 렛잇비미, 하얀 손수건, 조영남 씨의 딜라일라 이런 노래들이 유행했는데, 그 노래들이 다 번안곡이었어요. 근데 그날 제가 자작곡인 ‘행복의 나라’를 부르면서 하모니카 연주를 하니까 이백천 씨가 “너 이상한 음악을 하는 것 같은데 참 좋다.” 그러시면서 바로 그 다음 날 그분이 진행하시던 텔레비전 쇼에 저를 출연시켜줬어요. 당시에는 동네마다 1~2대씩 있는 텔레비전에 사람들이 백 명씩 모여서 보고 그러던 시절이라 시청률이 어마어마했죠. 그렇게 이름을 한 방에 알리게 됐는데, 사람들이 즐겨 듣던 이미자 씨의 노래와는 너무 다르고 머리도 길고 하니 잘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를 많이 하시더라고요. 그 뒤로 제 앨범이 금지곡이 되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다 결국 미국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한국에 돌아올 계획도 없이 떠난 거죠. 그런데 어떻게 일본에서 공연을 통해 조명을 받게 되고, 그게 한국까지 알려지면서 제가 이렇게 한국에 와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네요. 이번 음반도 여미영씨라는 라디오 피디가 기획을 했는데, 그분이 재정적인 면은 생각지도 않고 기획을 하셨더라고요. 그래서 어렵겠구나 했는데 팬들의 크라우드 펀딩으로 음반 계획이 현실화됐더라고요. 민망하기도 해서 펀딩 그런 거 하지 말라고도 했었는데, 많은 분의 노력에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저는 그저 삶을 일기 써 내려가듯 곡으로 만드는 사람이에요. 그런 제 노래에 많은 분이 공감을 해주신다는 게 참 행복합니다.


한대수의 대표곡들과 5년 만의 공연

마지막 공연이 2010년 세종문화회관 공연이었어요. 이번에는 엘지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데 사운드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고 하더라고요. 가수로서 욕심이 나는 공연장에서 공연하게 돼 열심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또 후배들과 함께 공연을 꾸미게 됐는데 제 세 번째 앨범작업을 함께한 손무현 씨, 여러 번 공연을 함께한 전인권 씨. 20년 전에 제 공연을 보러 일본까지 온 강산에 씨, 같이 방송 MC를 한 호란 씨 등이 함께하죠. 모두 두 번 생각하지 않고 함께한다고 해줘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또 우리나라에도 대가가 많은데 외국 기타리스트들에만 열광하는 현실이 아쉽더라고요. 그래서 에릭 클랩튼, 제프 백, 팻 메시니 못지않게 훌륭한 손무현, 신대철, 김목경, 김도균 씨가 기타 애드리브를 주고받는 걸 엔딩 프로그램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아이디어를 내봤는데 굉장히 재미있을 것 같아요. 요즘 시대에는 컴퓨터로 찍어내는 음악과 늘씬하고 멋진 외모의 가수들이 기획사 시스템을 통해 배출되고 있고, 팬들이 그런 음악에 열광하고 있잖아요. 저도 아이돌 가수들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입이 떡 벌어지더라고요. 그렇지만 아무리 시대가 그런 걸 요구해도 한 편에선 기타 치고 하모니카 불고 자기 얘기하는 그런 음악들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잖아요. 관객분들이 이번 공연에 더욱 열린 마음으로 오셔서 편안하게 공연을 즐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서로 양호하게 환호의 음성이 있었으면 좋겠고요. 저도 많이 기대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CONCERT

행복한 거장, 한대수

한대수 콘서트

Reverse | Rebirth

어쿠스틱 아방가르드, 록앤블루스. 총 세 파트로 나누어 공연을 선보이는 한대수 40주년 기념 트리뷰트 콘서트가 열린다. 한대수뿐 아니라 전인권, 강산에, 손무현, 신대철, 김도균, 김목경, 호란 등 한국 최고의 뮤지션들이 대거 참여해 그의 노래를 새롭게 해석해 들려준다. 일정 및 시간 4월 25일(토) 저녁 7시, 26일(일) 저녁 5시 장소 LG아트센터 출연 한대수 밴드, 전인권, 강산에, 손무현, 신대철, 김도균, 호란, 김목경, 바비렛츠, 이우창, 하찌 외

문의 02-2005-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