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에세이] 생강나무꽃

햇살이 더 없이 따사롭다. 겨우내 독기를 품고 온 세상을 휘감던 노기는 언제인지 모르게 슬며시 풀리더니 바람마저 훈풍이다. 언젠가부터 이런 날은 커피 한 잔을 들고 베란다 햇살 속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산길을 오르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더니 오늘은 한 무리의 산책객이 사라지면 다음 무리가 보이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산길을 오르내리고 있는 풍경이 이어진다.

아직은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얼핏얼핏 푸른 듯 노란빛이 야트막한 산 군데군데 무리지어 있다. 겨우내 보이지 않던 빛깔이니 산으로 올라가 확인해 보지 않아도 분명 생강나무 꽃이 분명하다. 나도 모르게 커피잔을 들고 거실 창가로 오게 한 냄새가 저 생강나무 꽃향기 때문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거실창문을 닫고 앉아 있는데 생강나무 꽃향기가 코끝에 스는 것 같다. 너무 깊이 들이마시면 질식해버릴 것 같은 알싸하고도 향긋한 냄새! 그게 생강나무 꽃향기다.

생강나무꽃, 이 나무야말로 봄을 알리는 전령사가 아닐까? 생강나무꽃이 피어야 개나리꽃이 피고 진달래꽃이 피고 본격적인 봄이 시작된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 채 물러가지 못하고 섞여있던 한겨울의 독기도 풀어지는 게 이때인가 싶다. 그 속에서 봄이 어디쯤 왔을까 의문이 들 때쯤, 숲속 어디선가 꽃향기를 날리는 나를 끌어들이는 꽃이 바로 이 생강나무 꽃이다. 숲에서 한껏 수줍게 피어나 겨울이 가고 봄이 왔음을 확인시켜주는 생강나무꽃인 것이다.

생강나무꽃을 내가 처음 만난 곳은 어렸을 적 살던 동네 뒷산이었다. 봄이 오면 들판으로 쑥이나 냉이를 캐러 나섰다가 알 수 없는 꽃향기에 이끌려가다 보면 만나는 게 이 생강나무였다. 생강나무 꽃향기가 얼마나 진했는지, 생강나무 밑에 서면 숨이 턱턱 막히도록 꽃향기가 짙었다. 난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한동안 생강나무 꽃향기 속에 머물곤 했다.

그 꽃향기 속에서 내가 커서 내 집을 가지면 뜨락에 저 생강나무를 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서울에 살게 되고 아파트에 살다 보니 그건 한낮 꿈으로 사라지는가 했는데 이곳 아파트로 이사와서 생각지도 않게 이 생강나무 꽃향기와 해후를 했으니 복도 이런 복이 없다.

문득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이 생각난다. 소작농 아들을 좋아하는 점순이가 생강나무꽃이 지천으로 핀 숲속으로 소작농 아들을 밀며 같이 넘어지면서, 둘은 생강나무 꽃구름 속에 눕게 된다. 물론 제목이 동백꽃인데 그게 왜 생강나무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우리 고향 강원도 시골에서는 이 생강나무를 산동백으로 불렀다. 그걸 김유정은 ‘노란 동백꽃’으로 표현하며 그 생강나무 꽃향기까지 담아냈으니, 참으로 기막히도록 멋진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숲속에 바람이 이는지 잔 나뭇가지가 일렁인다. 이런 날, 저 생강나무 꽃향기 속에 들면 그때 그 시절의 점순이와 소작농 아들의 풋사랑 시절이 내게도 달려올 것만 같아 현관문을 열고 생강나무 꽃향기를 찾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