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02 07:32

호텔이 된 문화재… 400년의 품격을 누리다

나무와 흙으로 짓는 한옥은 건강하다. 이음과 맞춤이 단단한 결구가 돼 수천년의 역사를 잇는다. 자연 속에서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한옥.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사리현동에 있는 한옥 마을 ‘정와속 한옥에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어느새 자연과 하나가 된다. / 영상미디어 이경민 기자
'수컷은 청청한 잎이 달린 단단한 가지를 물어다가 견고하고 네모난 집을 짓고, 드나들 수 있는 홍예문도 내고…. 암놈은 요기조기 집 구경을 하고 나서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잡기만 하면 짝짓기가 이루어진다. 그래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그게 내가 벼락 치듯 깨달은 정답이었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박완서의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보다 접어놓았던 문구를 오랜만에 다시 펼쳤다. 속절없이 세속화된 여인네의 후회를 '작아도 하자 없는 집'으로 돌려 말한 깊은 속을 그땐 별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과시와 소유의 대체어로 자리 잡은 현대의 집은 어느덧 절망이란 옷을 입었다. 살기 위한 집이 아닌 '사기 위한 집'으로 바라본 결과였다. 참 고약도 하지. 사람을 위한 집을 찾다 보니 한옥으로 응집됐는데, 그 한옥도 사람 없이는 폐허였다. 결국 사람이 집을 만들고 집이 사람을 만들어낸다. 안동 고택지기의 바지런한 손길은 버려진 옛집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목공장인의 단련된 근육은 시멘트·못 하나 없는 온전한 한옥을 일산에 재현해놨다. 집이란 '물건'을 찾아갔는데 '사람'을 얻어왔다.

고택과 모던이라는 모순형용이 최적화된 안동 구름에 리조트. ① ‘서운정’ 에 있는 욕실. 창을 열고 목욕해도 시야를 방해받지 않는다. ②구름에 리조트의 정갈한 느낌의 객실. 보안을 위해 자동잠금장치 유리문을 달았다. TV는 없지만 와이파이가 된다. ③구름에 리조트 전경 / 영상미디어 한준호 기자
"언니도 병이야. 일 없으면 불안하지?"
세 살이나 어린, 그러니까 세월로 보자면 서당개도 풍월을 읊고, 밥그릇 수로 따지자면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쌓아도 될 정도로 차이가 나는 회사 동기가 던진 말에 갑자기 '얼음'이 됐다. 반박문으로 대자보 분량은 쉽게 뽑아낼 줄 알았는데, 영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보는 눈은 밥그릇 많고 적음이 결정하는 건 아닌가보다.
굳이 따지자면, 일 중독자에 가까웠다. "통장 잔고나 쇼핑 중독, 혹은 권력과는 상관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뭔가에 기여하고 뭔가를 해냄으로써 '참 잘했어요' 도장을 받고 싶었다는 얘기다. 나머지는 시시했다." 경제학자인 토드 부크홀츠의 저서 '러쉬'의 '신봉자'로 그가 책에서 내뱉은 고백 같은 자랑(?)에 밑줄을 백 개는 그어놓는 쪽이었다. 그렇게 인터넷을 뒤지던 순간 머릿속에서 누가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 "이 멍청아. 똑바로 일해."
컨설팅 회사 뉴 하이어의 줄리엔고든 파트너가 비즈니스 인사이더에 기고한 '높은 성과를 내는 이(high performers·이하 성과자)와 일 중독자(workaholics)의 차이'란 글 때문이었다. '성과자의 목표는 제대로 일을 하는 것이고, 일 중독자는 그저 바쁜 것이다. 성과자들은 산만하게 하는 일을 제거해 본인 의지대로 일하지만 일 중독자들은 이메일과 계획 없는 일에 바로 반응해 정작 중요한 일은 놓친다. 성과자들은 어느 만큼이 충분한지 알지만 일 중독자들은 충분한 게 어느 만큼인지 모른다. 성과자들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알지만 일 중독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검증받으려 하고 주변의 실망 섞인 잔소리에 대한 두려움과 함께 산다.' 이런. 이거야말로 무슨 논박 한 줄 못하겠다.
경상북도 안동행 버스에 올랐다. 사람 숲을 벗어나 한적한 고택(古宅)에서 생각 정리 좀 해보라는 조언에 끌렸다. 자연 친화적이고, 아담한 조형미로 친근감을 주며, 살갗을 비비는 촉각과 쿰쿰한 나무 향이 자극하는 후각이 오감을 만족하는…. 한옥 예찬을 하자면야 끝이 없겠지만 우선 목표는 '도심과의, 사람과의 단절'이었다. 오롯한 공간을 지배하면서 고고(孤高)해 보고 싶었다. 그렇게 닿은 고택 리조트 '구름에'. 안동이야 워낙 반가(班家)로 유명해 이름난 고택이 한둘이 아니지만 굳이 택한 이유는 있었다. 안동댐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마을의 고택 일곱 채를 기와, 디딤돌, 처마, 기둥 하나하나 모두 가져와 재배치했다는 설명이 기왕 이곳으로 향하게 했다. 좀 더 솔직하자면 화장실 등 일부 현대적으로 개조됐다는 내부에 안도해서다. 한옥의 참맛은 그런 '불편함'과 '느림'의 미학에 있다지만 잘 돼 있는 건 향유할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


구름에는 사람 수에 따라 ‘한 채’혹은 ‘방’ 을 나눠 이용할 수 있다. 칠곡 고택의 사랑채. 대청에 욕실까지 시원하게 펼쳐지는 구조다. 다락도 있다. www.gurume-andong. com. 054-823- 9001.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부들부들한 이불을 덮고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데 무슨 초능력이라도 생긴 줄 알았다. 서울 선 못 느꼈는데 굉장히 소리에 민감해졌다. 서걱서걱 바람, 차랑차랑 물결, 낭창낭창한 풍경 소리…. 밤은 깊고, 동물적인 감각이 살아난다.

◇지역과 사람, 교감하다… 안동 구름에 리조트


1 구름에의 직원들. 재주 많은 안동 시민이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2 객실마다 계절에 어울리는 꽃이 다르게 장식된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3 빛축제 중인 일산 정와 한옥마을. /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지금 제가 공연을 하고 와서요…." 지난해 7월 문을 연 안동 구름에 리조트의 회계 담당인 권경은 팀장의 목소리가 가쁘다.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란다. 지금도 주말이면 하회마을에서 상설 공연에 나선다. 한옥의 아름다움과 호텔의 장점을 최대한 구현해놓은 것도 눈길 끌기엔 충분했지만 구름에가 특히 흥미로웠던 건 그를 이루는 사람 때문이었다. 김상철 지배인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이 '징비록'을 집필해 유명한 안동 '옥연정사'를 부인과 함께 7년간 관리한 이력이 있고, 서비스 담당인 박준해 주임은 대금·소금 등 연주에 일가견 있다. 정갈한 아침 식사를 건네주는 조연희 주임의 넉넉한 웃음소리가 예사롭지 않아 물었더니 국악 예능인이란 답이 돌아온다. 판소리가 일품이란다. 모두 이 지역 출신. 그런가 하면 솜씨 좋은 이불은 지역 이불 장인 최순녀씨의 작품이다. 구름에 리조트 자체가 SK행복나눔재단과 안동시가 설립한 사회적 기업이어서 지역 주민이 구성원을 채운 점도 있지만 안동에 재주꾼이 많은 건지, 사람을 놀래는 재주까지 지녔다.
"문화재가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으려면 사람의 발길이 끊기지 않아야 하지요. 사람이 살고, 자고 가는 문화재가 되면 400년 된 고택이 앞으로 400년, 1000년 유지는 문제없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옥연정사에서부터 1000명이 넘는 사람들과 밥을 함께 먹으며 느낀 건데 고택에 오면 프로그램 같은 게 필요가 없어요. 고택 자체가 프로그램인 거죠. 방에서 안 나오시려고들 해요. 하하."
김상철 지배인은 고택은 운명이라 말한다. 예전 대통령상까지 받았던 잘나가는 농민이었던 그가 사기를 당해 한순간에 몰락했을 때 그를 살린 게 고택이라 했다. "어려울 때는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는데 이젠 사람과 교감하는 게 재미가 있어요."
권경은 팀장은 "구름에를 통해 전통문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거 아닙니까"라며 자신에 찬 목소리였다. "전통문화를 하는 사람은 대개 생계가 어려워요. 관심 있어 접근했다 밥벌이가 되지 않으니까 죄다 떠나죠. 고민이 많았어요. 영화 콘서트 이런 건 돈 주고 보면서 왜 전통문화는 무료 공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전통도 합당한 가치를 인정받는 때가 오는 거라 생각해요."
안동 옥야동 시장에서 '행복수예'를 운영하는 이불 장인 최순녀씨는 다소곳한 목소리로 "손님들 의견을 최대한 듣다 보니 서울서도 이불 하러 온다"며 웃는다. 광목 이불의 경우 5번은 충분히 헹궈 풀을 빼고 자연 바람에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최대한 피부에 닿는 촉감을 편안하게 한다. 여름에는 삼베 광목 등을 이용해 이불과 옷을 짓는다. "삼베 같은 경우는 수의를 만들 때 땅속에 들어가면 다른 실이 엉켜 있는 것과 달리 보슬보슬 올이 다 풀어져 있다데요. 끝이 잘 풀리란 의미도 있다는 거죠. 좋은 의미 담다 보니 저도 행복해지고…."
구름에는 200년에서 400년 된 고택 7채에 12개 객실로 이뤄져 있다. 커다란 욕조가 있는 '서운정'은 예약 1순위 마감이고, '계남고택'은 퇴계 이황의 8대손이 지은 종가로 문화재에서 밤을 보내는 감흥을 느낄 수 있다. 3대가 찾기도 하고 시어머니·장모가 대청에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김지영(42)씨는 "중학생 아들과 오랜만에 대화를 했다"며 "가족이 다시 형성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현대식이라 하지만 고택의 풍미는 최대한 건드리지 않았다. 옷장은 벽 뒤로 숨었고, 옷걸이는 옛날 방식 그대로 대나무 횃대가 대신했다. 보안을 위해 두꺼운 유리문을 달거나, 보온을 위해 단열재를 충전한 것은 배려로 보인다. 꽃꽂이며 선반, 휴지통, 벽장식 하나하나 예사롭지 않은 손길이 눈에 띈다. 곱게 차려입은 세 모녀는 이헌구 사무국장의 안내로 다른 고택을 구석구석 돌아보더니 "세상에"를 연발한다. 체험 코스도 있다. 사과차를 마시고 사과꽃 피는 꽃길을 거니는 '봄맞이 사과꽃 프로모션'이 18일부터 30일까지 준비된다.수묵담채화같이 우아하고 호텔같이 고고한 구름에가 한층 편해진다. 생각이 열린다. 사람의 힘이다.
◇16년 고집, 빛보다… 일산 정와 한옥마을
처음엔 거리 때문이었다. 총 15만 ㎡(약 4만5500평) 부지에 전통 한옥마을이 조성됐는데, 서울 시내에서 차로 40~50분 거리라 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지하철 3호선 삼송역에서 37번 마을버스를 타고 20~30분 달리면 마을 입구 바로 앞에 도달한다. 비닐하우스 길을 걸어서 5~10분 정도 지나다 보면 산을 타고 딴 세상이 펼쳐진다.
2018년까지 전체 72채를 목표로 현재 1차로 21채가 완공돼 지난 3월 5일 문을 열었다는데 지금은 야간에만 개장하는 '빛축제'를 하고 있었다. 5월 1일 문을 연다는 홈페이지 소식을 보고 찾았더니 마침 그날 정식 개장이 5월 22일로 미뤄졌다는 본부장의 전언이 들린다. 현재 들어가 볼 수 있는 한옥은 6곳뿐이었다. 슬쩍 둘러보기엔 8000원(주말 성인 9000원)이 다소 비싼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조금 더 바짝 다가가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일부 화장실을 제외하곤 황토, 나무, 송진 등을 이용해 못 하나 쓰지 않고 천연으로 일궜다. 울진·삼척에서 공수해온 황장목(금강송)을 3년간 자체 자연 건조해 틀을 만들었고, 기와집 처마에 있는 수키와 끝에 바르는 와구토(瓦口土·혹은 아귀토)마저도 우뭇가사리, 다시마, 고구마 전분, 황토, 송진, 돌가루 등을 이용해 천연 재료로 만들었다. 6번 시도해 겨우 성공했다고 한다. 화엄사 무량수전을 닮은 팔작지붕 형태에서 초승달 모양의 추녀마루로 곡선을 이루는 조형미가 마치 버선발로 사뿐사뿐 춤을 추는 듯하다.
숭례문 기와 공사 등에 참여한 와공 이근복(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 장인을 비롯해 와공 18명, 송영덕 대목과 송덕남·김만섭 대목 등 목수 50명 전문가 총 68명이 투입되는 등 지금까지 총 작업자 1008명이 한옥마을 조성을 위해 작업했다. 한 채당 정원을 소담스레 갖춘 것도 눈에 띈다. 지금껏 수백억원이 들었다. 산 중턱 집에선 저 멀리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봉, 원효봉, 노적봉의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의 개인 사업가가 기초 구상 단계부터 10년, 건축에 6년 총 16년에 걸쳐 차근차근 완성해 나갔다고 하니 보통 정신은 아닌 것 같다. 한창 목공을 하는 김만섭 대목은 "한 채 짓는 데 1년이 넘게 걸렸다"면서 "옛 방식 그대로 천연 재료로 모든 걸 완성한 건 내가 봐도 온전한 정신으론 하기 힘들다"며 웃는다.
마당에서 제주도 삼겹살 굽는 냄새가 하늘로 향했다. 카페 지하엔 오는 9월쯤 구절초 한증막을 오픈한다고 한다. 정와(靖窩)는 편안한 집이란 뜻이다. 엄마 손을 놓지 않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고요를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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