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脈을 잇다] "세계서 통하는 빵맛, 100년 공력은 쌓아야죠"

서울 마포의 리치몬드 과자점 권상범(70) 대표는 50년 넘게 빵과 과자를 만들었다. 개업 36년째인 리치몬드는 서울의 대표적 베이커리가 됐고, 그는 대한민국 제빵 명장이다. 하지만 그는 "유럽·일본을 능가하는 빵을 만들려면 100년은 공력을 쌓아야 한다"며 "대대로 기술과 전통을 쌓아야 세계적 빵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권상범은 살기 위해 빵을 배웠다. 경북 봉화에서 태어나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초등학교만 나왔다. 경북 의성 외갓집에서 운영하는 다과점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열일곱 살이다. 이후 대구 광월당을 거쳐 스무 살에 서울 풍년제과로 옮겼다. 월급 2000원에 숙식 제공이었다. "어깨너머 일 배우던 시절이죠. 반죽하는 선배를 오래 지켜보다간 불호령이 떨어졌어요. 아, 나도 저 맛있고 예쁜 단팥빵·곰보빵·케이크를 만들고 싶은데…."

새벽 3시에 일어나 남은 반죽으로 몰래 연습하던 청년을 제과 기술자 김충복씨가 눈여겨봤다. 권상범은 체계적으로 배웠고 스물일곱 살 때 삼선동 나폴레옹제과점 수석이 됐다. 이듬해엔 전국 빵·양과자 대회에 출전해 여섯 부문에서 우승했다. 3년 뒤 나폴레옹 강인정 사장은 그를 도쿄제과학교로 보낸다. 영역이 화과자(和菓子)까지 넓어졌다. "일본 제빵사들은 하얀 조리복에 자부심이 대단했어요. 2~3대에 걸친 제빵은 자랑이죠. 우리도 음식 만드는 사람을 인정할 시대가 올 것이라 믿었어요." 그는 귀국 후 아현동에 나폴레옹 지점을 열어 독립했다. 수년 뒤 가게 이름은 리치몬드로 바뀌었지만, 매일 새벽 빵을 굽고 오늘 빵은 내일 팔지 않는 원칙은 그대로다.

권상범에게는 아들이 둘 있다. 권형준(40)과 권호준(38). 초등학교 때부터 형제에게 크리스마스는 가장 바쁜 날이었다. "아버지 일을 돕는 날이죠. 중학생 때부턴 방학마다 보름 넘게 일해야 용돈을 주셨고요." 큰아들은 군을 제대하고 바로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도제 교육은 엄격해요. 힘들어 포기하고 싶었는데, 아버진 버티라고 하셨죠." 그도 아버지처럼 도쿄제과학교에 갔고 일본 최고 과자점에서 배웠다. 그렇게 8년간 수련하고 2007년 리치몬드로 왔다. 둘째 호준씨는 경영과 매장을 맡고 있다.

두 아들이 합세하며 여력이 생겨 분점을 냈다. 하지만 분점도 마포·서대문을 벗어나지 않는다. 권상범은 "우린 사업가이기 이전에 제빵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맛을 직접 관리할 수 없는 곳에 분점을 낼 순 없다는 것이다. "동네 빵집의 위기는 소비자 입맛을 잡지 못한 우리 제빵사들 잘못도 없진 않을 겁니다. 대형 프랜차이즈에 맞서려면 끊임없이 새 메뉴를 개발하고 맛과 품질에서도 앞서야지요. 우리 빵은 공장에서 가져온 냉동 반죽 빵과는 비교가 불가능해요." 리치몬드의 빵·과자는 400가지가 넘는다. 품질 관리를 위해 진열대 온도도 제각각이다.

리치몬드로는 외국 제빵사들도 견학 온다. 최근에도 인도네시아에서 30명이 다녀갔다. "이젠 우리 기술을 배우러 동남아·중국·러시아에서 옵니다. 유럽이나 일본을 능가하는 빵집 명가를 만들 겁니다." 권상범은 20년 전부터 제과 기술 학원도 열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해외 전문가를 불러 강의를 맡기고, 학생들 유학도 지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