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친구를 따라 한 교회에 가본 적이 있다. 친구의 강권으로 구경삼아 간 거였는데 교회 안에서 만나는 이들마다 나를 ‘집사님’으로 불러 당황스러웠다. 집사라면 적어도 몇 년간은 그 교회에 다니고 있는 성실한 신자라야 받을 수 있는 직분이 아닌가. “저, 집사 아닌데요.” 일일이 해명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진짜 집사가 워낙 많아서 그리 부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냥 호칭이 집사였던 것이다.
그래도 집사는 교회 테두리에서 맴돌지만, ‘선생님’이야말로 학교를 벗어나 종횡무진 누비고 있는 호칭이 아닌가 싶다. 직장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사실이다. 직장에서는 직위로만 불리다가 퇴직한 후 한두 해 지나면서 슬슬 선생님 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 좀 더 머리가 희끗해지면 어디를 가나 누구를 만나나 선생님을 면하기 어렵다. 가수이자 화가인 조영남의 말 그대로 뭘 가르친 적도 없는데 말이다. 그는 지난가을 팝 아티스트 낸시랭과 만났을 때, 선생님으로 불리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왜 자꾸 선생님, 선생님 그래? 내가 불편해요. 내가 뭘 가르친 적이 있어?” 올해로 칠순이면 싫든 좋든 들어야 되는 선생님을 대놓고 거부할 수 있는 건 예술가로서 그만의 특권(?)일 수도 있다. 내가 만약 “가르치지 않아서 선생님이 아닌데요” 하는 반박을 일삼는다면 상종 못할 유난스런 사람으로 여겨질 듯하다.
고령자 취업알선센터에서는 일자리를 구하러 오는 어르신들을 ‘할머니’, ‘할아버지’ 불렀다가는 야단맞기 십상이라고 한다.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좋아하신단다. 그러니 알아서 선생님으로 불러주면 그저 고맙게 들어야 하나.
선생님만 있고 학생은 없다
그런데 어떤 ‘선생님’은 정말 듣기에 민망하기 짝이 없다. 한 선배가 나를 자꾸만 선생님으로 불렀을 때가 그랬다. 성을 붙여 “성 선생님”하고 부르니 발음하기에도, 듣기에도 편안하지 않을뿐더러 선배가 후배를 그렇게 부른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딱 조영남식의 돌직구를 날리면서 선배에게 이의를 제기하자 ‘3차원적’ 해명이 돌아왔다. 1차는 선생님으로 불릴만하다는 것이고, 2차는 부르는 사람부터가 상대를 존중해주는 사람으로서 존중받기가 쉽고, 3차는 나이 먹어가며 남들이 들을 때도 품위 있어 보인다는 거였다.
선생님이라 부르고, 선생님으로 불리는 두 사람 외에 제3자까지 고려한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할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듣기 거북하니 이름에다 ‘씨’자 정도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럼에도 선배의 선생님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을 그리 부르고, 또 본인도 빈번히 듣다 보니 입과 귀에 선생님이 붙어서일까. 그렇다고 매번 제동을 거는 것도 서로 스트레스가 될 듯해서 넘어가곤 한다. 아마 이런 과정을 거쳐 처음엔 생소하던 선생님이란 호칭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거부감 없이 자리잡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길을 가다가 사장님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사원 한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데 왜 이렇게 사장님은 흔한지 몰라요….” 1960년대 말 유행가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이제는 ‘사장님’ 대신 ‘선생님’이, ‘사원’에는 ‘학생’이 들어가면 맞을 판이다. 도서관이며 문화센터의 강의실을 들여다보면 정말 열에 열 사람 선생님만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까닭이다. 수강생들이 강사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건 당연한데, 강사 또한 수강생들을 선생님이라 하니 그렇다. 강사보다 나이 많은 수강생들이 대부분인 평생교육강좌의 특성상 벌어지는 것이지만, 학생은 단 한 명도 없는 강의실이 되는 셈이다.
이렇게 선생님이 흔하다 보니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일도 벌어지는가 보다. 얼마 전 소위 ‘땅콩 회항’이 큰 문제가 되면서 비행기 안에서 일어나는 별의별 일들이 전․현직 승무원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무엇보다 ‘1등석의 횡포’ 경우들이 관심을 모았다. 이 가운데 모 대학 의대의 교수라는 어떤 승객은 승무원이 “선생님, 무엇이 필요하신가요?” 물었더니 큰 소리로 화를 내더란다. 내가 교수인데 이런 것도 신경 안 쓰고, 선생님이라고 불렀다면서 사무장 오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호칭?
굳이 ‘님’자를 붙일 것도 없이 ‘선생’이 어떻게 비롯된 단어인지만 알았어도 소리까지 지를 일은 없었을 터다. 선생은 중국에서 ‘큰 스승’을 일컬어 쓰이기 시작한 호칭이다. 원래는 공자, 맹자하는 ‘자(子)’로써 큰 스승을 지칭했는데 송나라를 지나 명나라에 들어가면서 선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으로 건너온 선생은 진화의 속도를 달리했다. 일본에서는 대학교수든 이름난 학자든 선생이란 호칭이면 그만이었다. 지금까지도 선생은 성씨에다 붙이는 최고의 존칭으로서 지극히 보수적으로 쓰이고 있다.
우리도 일제강점기까지는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이 범람하자 ‘님’을 달게 됐고, 그나마 대학에서는 ‘교수님’으로 변모했다. 고등학교 이하에서 머무르는 듯했던 선생님은 어느새 나이든 이들에 대한 보편적인 호칭이 되어버렸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노년층에 적절한 호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자영업을 하면 사장님, 어떤 직위를 갖고 있으면 그 직위대로, 나이가 위일 때는 선배님으로 부르면 된다. 그런데 점점 길어지는 수명과 함께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많고, 특히 초면에 존대한다며 붙이다 보니 너나없이 선생님이 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에서는 60세가 되면 장수를 기원하며 빨간 스웨터를 선물하기에 노년층을 ‘빨간 스웨터’라 부른단다. 우리도 어디 좀 신선하고 다정한 호칭이 없을까? 어제 강좌가 끝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동행한 급우는 이름에 님을 붙여 나를 불렀다. ‘언제 이름까지 알았나’ 하는 친근함과 더불어 ‘나도 진작 알아뒀어야 했는데’ 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씨를 붙이든 님을 붙이든 역시 가장 좋은 호칭은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에 있는 것 같다. 나이 들수록 좀체 불릴 일이 없는 이름이고 보니 더욱 그렇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시인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