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군 화개장터는 작년 11월 화재로 시장의 절반 이상이 불탔던 아픔을 이겨내고 다시 문을 열었다. ‘화개장터’ 란 노래로 이 시장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려낸 조영남도 시장이 다시 일어서는 데 큰 도움을 줬다. / 염동우 영상미디어 기자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자리 잡은 경남 하동군의 이 시장은 가수 조영남의 영원한 채무자다. 100장 가까운 앨범을 낸 이 가객(歌客)의 유일한 히트곡이 오랫동안 잊혔던 이 시장을 되살렸다. 화개(花開), 꽃이 만발한 곳이라 이렇게 이름 붙은 이 시장에 작년 11월 화마(火魔)가 덮쳤다. 화개장터에 있는 80여 곳의 점포 중 42곳이 모두 타버리면서 약 1억9000만원(소방서 추산)의 재산 피해가 났다. 그때 겨울 칼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던 상인들은 그로부터 4개월이 흐른 지난 3일 봄바람을 맞으며 웃음꽃을 피웠다. 시장에 다시 화개, 꽃이 만발했다.
"아랫마을 하동 사람, 윗마을 구례 사람"만 이날 화개장터를 찾은 건 아니었다. 화개장터의 영원한 채권자 조영남도 4개월간의 재단장을 마치고 다시 문을 여는 상인들을 축하해주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아따, 조영남 슨새임(선생님)! 겨우살이 차 한잔 마시고 가요. 공짜라." 가는 곳마다 상인들이 조영남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곳 상인들이 조영남을 평소보다 더 반긴 것은, 그가 장터 재건에 큰 도움을 줬기 때문이다. "작년에 화개장터 화재 뉴스를 보다가 한 인터넷 기사 제목에 '화개장터에 큰불… 조영남 보고 있나?'란 제목이 붙은 걸 봤지. '당연히 보고 있지' 하고 생각하다가 번뜩 자선 콘서트를 해야겠단 생각이 들더라고."
연말 공연과 전시회로 바쁜 와중에도 그는 부랴부랴 화개장터 돕기 공연을 열었고, 수익금은 모두 화개장터를 돕는 데 썼다. 그의 이런 자선 콘서트 소식이 알려지면서 화재 이후 전국에서 답지한 성금만 3억2000만원이 넘었다. 이 돈을 종잣돈 삼아 화개장터는 "보기엔 그냥 시골 장터지만, 있어야 할 건 다 있는" 지역 명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화개장터가 조영남에게 진 빚이 늘어난 셈이다. 그래도 상인들은 시장을 찾은 조영남에게 "이거 하나 사가요"라고 영업(?)하는 걸 잊지 않는다.
게다가 벚꽃 철과 맞물리면서 이날 화개장터엔 "광양에선 삐걱삐걱 나룻배 타고, 산청에선 부릉부릉 버스를 타고" 온 전국 각지의 손님 1만여 명이 몰렸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는" 화개장터에 없는 것은 도둑이라지만, 방심은 금물. 뜨내기 손님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상인들에게 함부로 홀렸다간 빵빵했던 지갑이 혹독한 다이어트에 돌입하게 될지도 모를 곳이 바로 시장이다. '명인당 약초'란 간판이 걸린 가게 앞에 잠깐 눈길을 주니 주인 이쾌순(53)씨가 손을 잡아끌며 묻는다. "총각?" 얼떨결에 "신혼" 하고 답하니 몸에 좋다는 약초들을 이것저것 권한다. "사투리 잡담에다 입씨름 흥정이 오순도순 왁자지껄" 얘기하다 보니 어느새 손에 몸에 좋다는 겨우살이 약초와 참새우를 한 바구니 가득 들고 있다.
봄은 1년 중 화개장터의 장사가 가장 잘되는 때다. 화개장터의 명물인 엿장수 정덕순(51)씨는 "10년 동안 이 철에 바짝 벌어 애들 키워 대학까지 다 보냈다"고 말했다. 가판대 옆에 놓아둔 노래방 기계는 호객용이다. 손님들이 정씨의 가위질 소리에 따라 노래 부르면 엄마를 도우러 온 딸 이국희(24)씨가 옆에서 덩실덩실 춤추며 눈길을 끈다. 흥이 올라 장단을 맞추면 어느새 옆에 온 정씨의 목소리. "엿 드슈, 총각."
저녁놀이 깔릴 때쯤 장터 재개장 축하식이 열린다. 하동군수, 하동 지역구 국회의원, 경남부지사, 경남도의회 의장, 하동군의회 의장 등의 축사가 길게 이어진 후 마지막에 조영남이 단상에 오른다. "사실 내가 고백할 게 있어요. 이 '화개장터'로 내가 잘 먹고 잘 살았지만, 사실 이 노래 가사는 내 친구인 국회의원 김한길이 붙여준 거예요. 옛날엔 저작권 개념이 없어서 얼렁뚱땅 내가 지은 노래가 된 겁니다. 그러니 내 친구 김한길이 어려워지지 않도록 다들 빌어주세요. 나 찾아오지 않게." 또다시 화개, 웃음꽃이 핀다. 이어 상인이고 손님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알고 있는 그 노래 '화개장터'가 울려 퍼진다. 록페스티벌 못지않은 '떼창'에 꽃잎마저 흥겨운 듯 몸을 떤다.
흥이 한껏 올라 시장을 나설 때쯤 다시 '명인당 약초' 가게를 지나친다. 웃고 있는 주인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건넨다. "오늘 장사 잘돼서 좋겠어요." 답이 돌아온다. "아이고, 많이 못 팔았어. 이거 하나 보고 가." 흥에 취한 정신이 번쩍 든다. 맞다, 여기는 "고운 정 미운 정 주고받는" 시장이다. 끝까지 방심은 금물.
여행수첩
가는 길: 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전주→19번 국도→구례→화개장터, 또는 경부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전주→19번 국도→구례→화개장터
맛집: 봄철 하동의 양대 별미는 재첩과 벚굴(강굴)이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쪽으로 올라가다 만나는 청송회식당(055-883-2485)과 혜성식당(055-883-2140)은 재첩국을 중심으로 한 재첩 요리로 알려진 라이벌 식당이다. 부흥재첩식당(055-884-3903)과 하옹촌(055-883-8261), 부두횟집(055-883-8288) 등도 이름난 재첩 맛집들이다. 속을 시원하게 씻어주는 재첩국뿐 아니라 매운 양념으로 새큼하게 무쳐 낸 재첩무침도 별미다.
벚굴은 4월까지 제철로 친다. 하동 아래쪽 광양시의 망덕포구에 있는 망덕횟집(061-772-0625)
숙소: 하동 화개면의 명소인 쉬어가는 누각(055-884-0151∼2)은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굿 스테이' 숙박업소이다. 문을 열면 보이는 맞은편 산자락은 차밭이 펼쳐진 명당이다. 한옥펜션인 수류화개(055-882-7706)는 화개장터에서 5분 거리라는 입지가 장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