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5.04.14 09:48

[시니어 에세이] 쑥을 뜯으며…

봄바람이 산들산들 불고 있다. 산책길이 너무도 상큼해 겨드랑이에서 천사의 날개라도 돋아날 것만 같은 봄날이다. 내 발걸음이 더없이 가벼우니 봄날을 기다렸던 들판에 사는 것들이야 말해 무얼 하랴. 산책길 한켠에 홍매화 아직 지지 않았는데 개나리 진달래꽃이 만개했다. 계단 틈에 수줍게 피어난 보랏빛 제비꽃이며 노란 민들레꽃에 홀려 길을 잃었다.

나도 모르게 어느 해인가 커다란 태풍에 쓰러진 나무를 잘라 만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계단을 피해 다니고 있는데 들꽃에 홀려 계단을 걸어 산을 오른다. 싸리나무 밑에 어른 한 뼘만 한 새 한 마리가 종종거리며 나를 쳐다본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꼬리가 눈에 들어온다. ‘종달새인가?’ 나도 모르게 나오는 소리에 웃고 만다. 봄에 만나는 새라면 무조건 다 종달새로 명명해 버리는 내 무식함 탓이다.

산중턱 비탈에 원추리 군락이 펼쳐져 있다. 연한 연둣빛 원추리가 지천이다. 잠시 멈추어 바라보다 괜스레 한번 당겨본다. 뿌리 끝에서부터 완강함이 느껴진다. 바람찬 산비탈에서 혹독한 추위를 견뎌낸 여리고도 강인한 목숨이다. 한겨울 몰아치던 북풍에 쓸려가지 않으려 발부리에 얼마나 힘을 주었을까 생각하니 참 대견스럽다. 제 키의 네다섯 배가 넘는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사는 들풀들이 이곳의 주인이다. 지나가는 나그네가 괜히 어정거리며 그들의 삶에 훼방을 놓으려는 내가 수상했던 모양이다. 상수리 나뭇가지 위에서 청설모 한 마리가 머리를 갸우뚱거리고 바라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돌아서서 사라져 버린다.

샛길로 접어든다. 말이 샛길이지 길이 없다. 길도 아닌 길이 끝나는 곳을 조금 더 마른 풀숲을 헤치고 들어서자 열서너 평 평지가 나온다. 쑥대밭이다. 꼭 작년 이맘때 들러보곤 처음이다. 무릎까지 오는 쑥대가 말라 비틀어져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앙상한 쑥대를 걷어내자 쑥이 자라고 있었다. 용케도 말라비틀어진 쑥대 사이로 봄 햇살을 불러들여 움이 트고 파릇하게 자라고 있는 것이다. 낮은 곳에서 겸손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강인한 생명력으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다.

봄 햇살 속에 앉아 가만가만 봄노래를 불러 본다. 보는 이도 없지만 누군가 내 노랫소리를 듣는 것 같아 민망스럽다. 내게도 들릴 듯 말듯 흥얼거린다. 그런데 손이 나도 모르게 쑥을 뜯고 있었다. 진한 쑥 향이 콧속으로 스며들어 날 먼 유년의 시절로 데려간다. 쑥버무리나 쑥국이 그리워지는 봄날이다. 그대로 앉아 되지도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기보다는 쑥을 뜯기로 했다. 마른 쑥대 밑에서 자라 여릴 대로 여리니 구태여 칼이 필요가 없다. 손끝으로만 뜯어도 잘 뜯어지니 한 줌만 뜯기로 했다. 내 욕심대로 하자면야 한 바구니를 뜯어도 성에 차지 않는다. 굳이 그러지 않는 것은 그들도 살자고 한겨울을 이겨내고 이 세상에 왔는데 같이 살다가자 싶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이곳에 왔었다. 해마다 나만 아는 이곳에 와서 쑥 한 줌을 뜯어다가 쑥국을 끓였다. 삶아놓은 쑥에 소고기를 넣어 곱게 다져 완자를 만들었다. 쑥국 육수가 팔팔 끓으면 만들어 놓은 완자에 달걀옷을 입혀 쑥 향이 가득한 쑥국을 끓여 식탁에 올렸었다. 빛나는 봄 햇살과 살랑대는 봄바람이 가득 스며든 쑥국이 식탁에 오르면 그제야 봄이 내 곁에 온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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