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산선문을 따라가는 중이다. 지금까지 실상산문, 가지산문, 희양산문, 동리산문, 사자산문 등을 답사하였다. 세월의 흐름 속에 숱한 변화와 흥망성쇠를 거쳤지만 위 5개 산문은 그런대로 실상사, 보림사, 봉암사, 태안사, 흥녕사 등 해당 산문의 종찰(宗刹)들이 현재에도 남아 불법을 펼치며 산사(山寺)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나머지 4곳은 절집은 남아있지 않고 그 흔적만 남아 폐사지 답사형태로 찾아보아야 한다. 그 첫 순서이자 구산선문의 여섯 번째 답사지는 사굴산문 굴산사지(사적 제448호)이다.
사굴산문(闍崛山門) 사굴산(闍崛山) 굴산사(崛山寺)
문성왕 때의 고승 범일(梵日)이 강릉의 굴산사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킴으로써 사굴산파 또는 굴산선파라고 불리게 되었다. 개조(開祖)인 범일은 831년(흥덕왕 6) 당나라로 건너가서 마조도일의 제자 제안(齊安)의 선법을 이어받아 847년(문성왕 9) 귀국하였으며, 곧바로 굴산사를 창건하여 40여 년을 살면서 선법을 전파하였다.
특히 그는 스승인 제안으로부터 ‘동방의 보살’이라는 찬탄을 받았고, 특이한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주창하였다. 진귀조사설은 선의 원류를 석가모니불에 두지 않고, 진귀조사로부터 석가모니가 선법을 전해 받았다고 주장하는 설이다. 범일의 법맥을 이은 대표적인 제자로는 개청(開淸)·행적(行寂) 등 10대 제자가 있었다. 특히 고려 중기에 선을 크게 중흥시킨 지눌(知訥)도 사굴산파 출신이다.
대관령 국사 서낭신 범일 국사(梵日國師)
범일(810~889)은 지금도 강릉 일대에서는 대관령 국사 서낭신으로 해마다 단오제 때 제사를 받들어 모시는 신격화된 존재이다. 구산선문 중 하나를 개산(開山)한 선사가 어찌하여 나중에는 서낭신이 되어 지역민들로부터 제사를 받는 대관령 주신이란 말인가. 이는 강릉지방, 특히 이 지역에서 왕족으로 대우받던 강릉 김씨라는 이유와 더불어 제한된 지역 문화의 특이한 점으로 주목된다.
즉, 신라 37대 선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자리를 놓고 상대등 김경신과 즉위 순서는 더 우선인 김주원이 다투었으나 김경신이 38대 원성왕으로 즉위하고 김주원은 힘겨루기에서 밀려나 강릉지역인 명주로 내려와 명주군왕으로 추대되어 아들, 손자까지 3대가 왕의 칭호를 받는데 그 김주원이 강릉 김씨의 시조이다. 그런데 범일 국사 역시 강릉 김씨로 속명은 품일(品日)이며, 그의 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문 씨다.
탄생설화를 보면, 옛날 학산리(鶴山里) 마을에 한 처녀가 굴산사(屈山寺) 앞에 있는 석천(石泉)에서 바가지로 물을 뜨니 물속에 해가 떠 있어 물을 버리고 다시 떴으나 여전히 해가 있으므로 이상하게 여기면서 물을 마셨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처녀에게 태기가 있어 마침내 아이를 낳았는데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마을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산모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과 산짐승들이 모여 젖을 먹이고 날개로 가려 따뜻하게 해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 믿고 아이를 데려와 키웠다. 아이가 자라자 경주로 보내어 공부시켰는데 나중에 국사가 되었다.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하여 ‘범일 국사(泛日國師)’라 부르게 되었으며,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굴산사(堀山寺)를 세웠다고 한다. 학이 아이를 기른 바위는 ‘학바위’라 하고 그 마을 학산리(鶴山里)는 지금도 강릉에 남아 전해진다.
추측건대 신라 왕족으로 왕이 되지 못하고 서라벌에서 먼 강릉 명주까지 밀려난 절치부심과 어쨌든 명주군왕 칭호를 받으면서 지방호족으로 자리 잡고 일문(一門)을 창업한 강릉 김씨의 자부심은 사굴산문을 정신적 지주이자 정치 및 종교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문에서 존경받는 지역인사를 내세워 그 지역의 정신적 구심점이 됨은 물론 시간이 흘러도 오래도록 받들어야 할 필요성에 따라 대관령 주신으로 모시는 신격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역시 강릉 김씨인 김시습이 범일 국사가 세운 것으로 알려진 부여의 무량사에서 생을 마감한 것도 무심한 일이 아닌 듯하다.
아무튼, 구산선문의 사굴산파 굴산사는 이제 폐사지로 남아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는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개산조 범일 국사는 서낭신으로 대관령에 모셔져 해마다 강릉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심을 받고 있으니 산천은 의구한 데 인걸은 간데없다는 옛말이 무색해지고 산천은 흔적도 없으나 인걸은 산신이 되어 여전히 모셔지고 있는 아주 특이한 경우이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한양을 중심으로는 살아 진천, 죽어 여주라는 말이 있듯이, 강릉지방에서는 살아 학산(鶴山), 죽어 구산(邱山)이라는 말이 있다는데 굴산사지가 있는 학산 지역은 지금 찾아가도 과연 살기 좋은 곳이구나 느낄 만큼 안온하고 편안한 느낌을 주는 곳이다. 대관령의 웅장한 산줄기 바로 아래인데 산세가 험하다거나 척박한 느낌은 들지 않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학산 마을이 있는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일대는 제법 널찍한 평지에 너른 논들이 눈에 시원하게 펼쳐지는데 그 가운데 투박한 돌덩이 두 개가 불쑥 솟아있으니 바로 전국에서 가장 크다는 굴산사지 당간지주이다.
성인이 옆에 서 있어도 작아 보일 만큼 큰 당간지주, 높이가 5m가 넘는 이 돌(石)지주에 꽂아 세운 당간은 얼마나 높을까? 보통 지주의 3배쯤이라고 하니 대략 15m 높이의 당간이 하늘 높이 솟았을 것이며, 또한 그 당간에 매달려 펄럭이는 당(幢)은 얼마나 화려하고 위풍당당하였을까?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다. 그만큼 굴산사의 사세(寺勢)가 대단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마치 영국의 스톤헨지 돌기둥 두 개가 이곳에 서 있는 것 같다.
이 당간지주는 논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있는데 옛날 굴산사의 입구쯤일 것이었으며, 지금의 마을 민가가 있는 곳은 모두 사찰 경내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간지주 근처에서는 3구의 석불이 발견되었는데 2구는 근처 작은 절집에 모셔놓았고, 다른 1구는 보호각을 지어 안치하였는데 이들은 모두 지권인을 취하고 있으니 비로자나 삼존불인 것으로 보인다.
당간지주와 석불을 뵙고 자리를 옮겨 마을 동산 아래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인 곳을 간다. 이곳에는 뒷산 학바위 아래에 범일 국사의 것으로 추측되는 승탑이 있고, 그 아래 평지에 범일 국사 탄생설화가 얽힌 돌샘(石泉)이 있다. 근처 수백 평은 지금도 활발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에 있는데 심심찮게 유물 출토 소식이 들린다.
굴산사지 승탑
발굴 작업으로 어수선하고 비만 내리면 질척거리는 이곳에 승탑 하나 외롭게 서 있다. 평범한 듯 보이는 8각 승탑이지만 부분적으로 변화된 수법을 보이며 받침대는 화려하기까지 하다. 바닥에 놓인 팔각 지대석에는 면마다 동물조각이 있고 급격하게 좁아지면서 하대석을 받치는 접시 모양의 받침돌을 이고 있다.
수반이나 접시 모양의 받침돌은 옛날 사진에는 안 보이는 것인데 나중에 찾아서 보완한 것인지 궁금하다. 그 위의 원형 하대석은 구름무늬를 3단으로 새긴 볼륨 있는 모습이며, 중대석 8면은 비천상들이 장구·훈·동발·비파·소(피리)·생황·공후(하프)·적(대금) 등으로 보이는 악기들을 연주하는 모습을 양각으로 새겼다.
상대석은 앙련무늬인데 커다란 연꽃잎 안에 다시 작은 꽃무늬가 있으며 몸돌은 아무런 장식 없이 팔각이며, 팔각지붕돌과 위에 얹힌 노반과 보개, 연꽃 모양 보주가 있는데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는 오히려 단순해 보인다.
지난 2013년 발굴결과, 조사구역 내에서 총 10기의 건물지와 담장지, 계단 등 다양한 유구가 확인됐다. 건물지가 모두 인접하여 배치되어 있으며 소규모인 것으로 보아 굴산사 스님들이 생활했던 승방지(僧房址)와 기타 생활을 위한 부속시설이 있었던 곳으로 보인다는 것이 발굴단의 평가이며, 그 밖에도 승탑의 부재들이 추가로 발견되어 최소한 2개 이상의 승탑이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도 계속 발굴 작업 중이니 마무리 되고 나면 전체적인 보고서가 나와 또 많은 놀라움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해 본다.
이곳 굴산사지는 구산선문 사굴산문의 종찰 굴산사가 있던 곳이며, 개창조 범일 국사가 탄생하고 자란 곳이다. 아직도 발굴 중인 미완의 지역이고, 아마도 마을 전체가 절집이 아니었을까 추측되는 곳이다. 당간지주 크기를 미루어보아 기존의 여느 절집 못지않았으리라 짐작해보면서 발굴을 마치면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