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한 봄꽃이 피어나는 날 혜화동 마로니에 공원의 어둠이 나를 설레게 하였다. 오래전 우리는 그 길을 걸어가면서 얼마나 많은 상상 속의 세상을 꿈꾸었던가. 또한, 그 꿈들은 우리 곁에서 세상과의 타협을 시도하면서 또 얼마나 많은 좌절과 인내와 기다림을 알려주었던가. 내가 서 있는 세상과 나의 자아가 숨어있는 문 뒤의 세상이 오래전의 꿈들을 하늘거리는 꽃잎처럼 날게 하던 날이었다.
문 뒤에서 만나는 환상의 세상에는 웅크리고 숨어 있던 우리들의 자아가 아지랑이처럼 잡을 수 없는 형체를 하고서 나타난다. 항상 우리는 일상의 도피를 꿈꾸면서 이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삶에 지쳐갈 때 잠시 숨을 돌리고 만날 수 있는 이상의 세계가 있음이 때로는 대리만족으로 일상의 도피처를 제공해준다.
뮤지컬 ‘Through the Door’는 작가 주디 프리드와 작곡가 로렌스 마크 와이트가 2007년부터 준비해 2008, 2009년 런던 쇼케이스, 2011년 뉴욕 리딩을 통해 마케터 및 관객, 평론가에게 선보였다. 이후 국내 기획 및 제작팀이 협력해 서울에서 첫 공연을 하게 되었다.
누구나가 지니고 있는 문 뒤의 세상을 향한 무대의 조명은 화려함으로 장식되는 뮤지컬답지 않은 일상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샬롯과 레니는 결혼 7년 차가 되는 부부이다. 건축회사에 근무하는 레니는 아내의 생일에 꽃다발을 마련하여 귀가를 서두르지만, 개념 없는 사장은 레니에게 승진 약속과 함께 업무처리를 지시한다. 일에 대한 집착과 승진이 약속된 업무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레니의 회사 상황을 모르는 샬롯은 남편에 대한 섭섭함이 쌓여간다.
샬롯은 7년 동안 소설을 쓰고 있으나 시작점의 화려함하고는 다르게 베스트셀러 하나 없는 무명의 작가이다. 일상에서 지쳐가던 어느 날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속의 세상을 만나게 되면서 소설의 주인공인 카일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우리가 젊은 날 흔히 꿈꾸는 백마 탄 왕자가 샬롯의 상상 속 세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일에 지쳐있는 레니에게서 소외당하고 있다고 느낌으로 점점 카일 왕자와의 이상 속 세상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고 회사의 업무에 중요도를 잊고 레니의 업무에 차질을 빚게 한다. 화가 나서 귀가한 레니에게 “나는 7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몇 시간을 기다린 것에 화를 내느냐?” 고 반문하면서 소리친다. 관계는 일방적인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너와 나의 생각이 가슴으로 이어지는 대화로 하여 교감의 소통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레니는 회사업무에 충실한 것이 샬롯에 대한 사랑이라 생각한다. 일반적인 모든 남편의 사고가 반영되어 있는 극의 흐름에서 피해가지 못하는 현실 속 세상이 우리에게 무대와 자아의 연결을 시도 하게 한다. 아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가정생활과 사회생활의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남편들의 사고가 어긋나고 이상과 현실에서 만나는 삶의 극적인 대비에서 샬롯이 써가는 소설의 주인공인 카일 왕자는 나날이 새롭고 매력적인 일상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회사의 업무가 성공적인 계약으로 끝나고 승진을 기대하던 레니는 사장의 이중성에 대한 횡포에 회의를 느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언가를 깨닫고 아내가 있는 집으로 돌아오지만 레니를 기다리는 것은 썰렁한 빈집이다. 샬롯은 여전히 이상의 세계에서 자신이 원하는 꿈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르게 현실과 이상의 교차점에서 서로가 원하는 것의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화성 남자 금성 여자라 했던가. 레니가 생각하던 불빛 따스한 가정과 따스한 아내의 마음이 사라지려는 위기감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자아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상의 세계와는 다른 감정의 교감은 함께했던 시간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는 사실로 하여 현실의 세계를 되돌리는 역할을 하여준다.
레니는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으로 샬롯에게 선택권을 준다. 자신은 기다리겠다는 짧은 말을 남기고 현실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샬롯은 그러한 남편의 사랑을 깨달으면서 따스한 불빛이 흐르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간다. 두렵다는 이유로 비바람을 피하면 더 큰 시련을 만날 수 있다는 카일 왕자의 말은 우리 일상의 현실에서 그대로 적용이 되어준다.
샬롯 역을 맡은 배우 오소연은 “음악도 좋지만, 작품의 이야기에 특히 공감했다. 우리 삶에 가까운 이야기를 다룬다. ‘미생’에서처럼 레니의 직장 생활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고, 치열한 현실에서 벗어나 자신이 꿈꾸던 소설 속 왕자를 만나 대리만족하는 샬롯의 감정도 이해가 가더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선다. 이 작품은 그 선택들에 맞서서 살아가자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녀의 이러한 감정이 기폭제가 되어 무대의 막이 내려지는 순간까지 그녀는 천연덕스러운 몸짓과 어투와 관객을 압도하는 음성으로 우리를 그녀의 상상 속 세상으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상상의 세상이 있다. 큰 붓으로 그려가듯이 우리가 마음으로 그려가는 상상의 세계가 어느 날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세상에서 과연 내가 원하는 나의 진정한 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세상에 많고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만난 한 사람이 가장 가슴이 넓은 따스한 사람이기를 바라는 모두의 마음을 작가는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겠냐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자신의 사랑으로 아낌없는 마음을 보여 주는 가슴 넓은 레니의 모습이었다. 현실이 조금 아프다 하여도 우리가 꿈꾸는 이상의 세계보다는 훨씬 더 따스한 마음이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 사랑으로 하여 다시금 갈등의 시간을 극복하려는 샬롯의 마음은 세상 모든 연인의 모습이다.
샬롯과 레니가 풀어가는 삶의 이야기들이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웃음을 자아내는 코믹연기로 때로는 어쩌지 못하는 현실로 갈등하는 안타까움이 되어서 우리 곁에 살그머니 봄날의 실체로 다가오던 시간이었다.